불교 음악 가운데 《회심곡》이란 게 있다. 불교 음악은 크게 범패와 화청으로 나눈다. 앞의 것이 주로 어려운 한문이나 진언으로 된 어려운 불교의례 음악이라면, 뒤의 것은 우리 전통 가락에 우리말로 된 가사를 붙인, 그야말로 한국식이다. 극단적으로, 좋은 인연 많이 만들라는 불교 가사를 싸이의 ‘강남스타일’ 멜로디로 부르는 방식이다. 화청은 그래서 대중의 호흡과 이해 수준에 맞춘 ‘대중가요’ 성격이 강하다. 포교를 위한 필연적 선택이다.
화청의 대표 주자는 누가 뭐래도《회심곡(回心曲)》이다. 문화재 관리국에서 펴낸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에 보면 《열반가》나 《왕생가》,《백발가》 등 다양한 주제에 따른 다양한 화청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가장 빈번하고, 폭넓게 유통되고, 가장 많은 이본(異本)이 남아 있는 화청은 바로 회심곡이다.
곡의 시작은 이렇다. ‘세상천지/만물중에/사람밧게/또잇는가(별회심곡)’, ’쳔디지의/분한후에/삼나만상…생략…‘라고 하여 세상천지 만물 중에 사람밖에 또 있는가 하거나, 하늘과 땅이 나뉜 후에 삼라만상이 일어나니 세상천지 만물 중에 사람밖에 또 있는가 하며 세상에서 사람이 가장 존귀한 존재라고 노래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이세상에/나온사람/뉘덕으로/나왓는가/석가여래/공덕으로/아부님전/뼈를빌고/어만님전/살을빌며/칠성님전/명을빌고/제석님전/복을빌어/이내일신/탄생하니(별회심곡)’ 나 하나 태어나기 위해서도 그 이면에는 많은 선한 조건들이 갖추어져 되어서야 한다. 그만큼 사람이 귀하다.
하지만 곡은 계속해서, ‘인간팔십/산다허되…중략…졀노된다(속회심곡)’ 라고 하여 그렇게 귀한 인간에서 풍전등화의 중생으로 뒤바뀐 삶의 무상함을 노래한다. 여든 살까지 산다고는 하지만 전생의 팔일과 비교도 되지 않는다고 꼬집는다. 잠을 자는 밤은 죽음과 같으니 깨어 있는 낮만 따지고 보면 사람은 겨우 사십 년도 못 사는 꼴이다. 젊어 곧고 똑바른 몸과 희던 살은 점점 굽어지고 머리도 점점 희여 간다.
어떻게 막을 방법은 그럼 없을까? ‘인삼녹용/약을쓰나/약효험이/있을손가/판수불러/경읽은들/경의덕을/입을손가…비나이다/비나이다/하느님께/비나이다/칠성님께/발원하고/신장님께/공양한들/어느성현/알음있어/감응이나/할까보냐.(별회심곡)’ 하고 아무리 노력해 보아도 이미 무상하게 지나가 버린 시간은 되찾을 길 없다.
가장 존귀하게 부여받은 인간의 진면목(眞面目)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허비한 결과, 어떠한 노력과 도움도 의미가 없이 그저 끝없는 육도를 윤전할 따름이다. 죽음 앞에 인삼과 녹용도 허사이고(별회심곡), 지장보살의 대원(大願)조차 소용없으며(회심가), 심지어 천주님도 하느님도 어쩔 수 없다(반회심곡).
존귀한 인간으로 시작한 회심곡은 무지와 욕망으로 인해 갈수록 비참해지더니 급기야 지옥 심판이라는 막다른 길로 밀어붙인다. 죽음이라는 생경한 사건과 지옥이라는 처참한 상황을 심화할수록 왜 중생은 본심(本心)을 등지고 육도를 윤회할 수밖에 없었는지 또한 그것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인지 하는 궁금증은 커져갈 즈음, 노래는 이렇게 끝난다.
‘선심하고/마음닦아/불의행사/하지마소/회심곡을/업수여겨/선심공덕/아니하면/우마귀신/못면하고/지옥고를/어찌할가(반회심곡).’ 회심하기를 소홀히 하여 선심공덕하지 않으면 윤회를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회심(回心), 곧 ‘마음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노래한다. 그러니 노래 제목도 회심이다. 인간이 만물 중 가장 존귀할 수 있는 이유는 잘못을 저지르고는 바로 참회하거나 후회하는, 마음을 되돌리고 회복하는 그 능력 때문이다. 회심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사실을 계속 환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