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존 여래좌상의 오른쪽 협시 보살상은 얼굴과 몸 전체를 왼쪽으로 돌리고 꿇어 앉아 마치 본존을 향해 공양하는 자세처럼 보인다. 오른쪽 겨드랑이에서 왼쪽 어깨 쪽으로 비스듬히 걸쳐진 천의(天衣) 자락이 표현되었고, 복부에도 나부끼는 옷자락이 보인다. 무릎 아래로 단판의 연꽃무늬가 있으나 대부분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머리 주위에는 본존과 같이 이중의 선으로 두광을 표현하고, 오른손은 발꿈치 쪽으로 내리고 왼손은 가슴 위로 들었지만 손에 들고 있는 지물은 확인할 수 없다. 보관은 화려한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고, 보관의 중앙에는 보병이 새겨져 있다. 관 띠 밑으로는 머릿결의 윤곽이 뚜렷하다. 보관에 보병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대세지보살로 추정된다. 본존의 왼쪽 협시보살상은 얼굴과 신체의 윤곽선으로 보아 몸을 오른쪽으로 돌린 모습이지만 보관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마멸되어 세부 특징을 확인할 수 없다. 광배는 원판을 포갠 듯한 이중의 원형 두광이다. 보관 중앙에 화불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관음보살로 추정된다. 좌우 협시보살이 각각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고, 참배자의 입장에서 불상을 향하면 서쪽이 되니 본존은 서방극락정토의 아미타불일 것이다. 본존불을 향해서 서로 다른 자세의 협시보살이 배치되는 형식의 마애불은 남산 삼릉계 선각 삼존불에서 찾을 수 있다. 거의 선으로 표현한 조각 기법과 대형화된 신체에 비해 느슨하고 섬약한 선, 위엄은 다소 있는 듯하나 밝지 않은 얼굴 표정 등에서 이 삼존불의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 후반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존이 새겨진 암벽 위 좌우에 목조 가구용 네모난 구멍이 있어 조성 당시에는 이 불상이 건물 내부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유적은 금강산 입구에 위치한 굴불사지 발굴 조사에서 수습된 ‘東寺’라는 명문을 근거로 ‘동암(東庵) 마애불’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어나 앞으로 더 연구가 필요한 실정이다. -마애삼존불 주변에 사찰이 있었다? 이곳 마애삼존불좌상 아래로 100여 m 내려가면 민묘가 있는 제법 넓은 터가 있다. 위쪽으로 대나무가 빙 둘러있어 한눈에 과거에 사찰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주위에 흩어진 기와조각이 다수 발견되고 있어 위에 있는 마애삼존불과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짐작을 해 본다. 어떤 이는 이곳을 자추사 터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차돈이 왕명을 빙자하여 사찰을 세우려 했다는 죄목으로 형이 집행된 장소가 왕궁이나 그 부근이었을 것이므로 순교 당시 이차돈의 잘린 목이 금강산 봉우리를 넘어 이곳까지 왔다는 추정은 아무래도 무리이다. 도량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사복이 죽은 후 그를 위해 금강산 동남쪽에 절을 세웠다고 하는데 이곳은 동북쪽이니 도량사지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위에 있는 마애삼존불좌상과 관련이 있는 사찰이 아닐까? 이 절터 아래 마을이 다부리(多富里)이다. 약 500여 년 전 진주 하씨가 처음 정착한 마을로 알려지고 있다. 주위에 불상이 많았다하여 다불리(多佛里)라고도 했다. 그 아래는 승삼(僧三) 마을이다. 이곳은 신라시대부터 큰 절이 있었던 곳으로 고려 때 스님 셋이 이 마을 뒷산 즉 금강산에서 내려와 관가 앞뜰로 들어가더니 호랑이로 변해 울며 달아나 강동면 호명리로 숨었다 하여 승삼촌(僧三村)이라 했다고 한다. 마을 안에는 구곡지라는 저수지가 있고 그 주위에 절터골, 작은 절터골, 큰 절터골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발굴조사를 한다면 많은 불교 유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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