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경주 지역에 남아있는 통일신라의 왕릉 가운데 석조 및 부조의 십이지신상을 호석 구조로 사용한 곳은 성덕왕릉, 황복사 금당지, 경덕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 원성왕릉(괘릉), 진덕여왕릉 등이 있으며, 그 밖에 고분으로는 김유신묘 및 경주 구정동 방형분 등이 있으며 이 외에 능지탑에서도 보여지고 있다. 본지 지난 1256호에서 다뤘던 ‘신라 왕릉과 고분 호석의 십이지신상(상)’에서는 호석(護石)의 정의와 십이지신상을 돌에 새겨 무덤 호석으로 발전시킨 것은 통일신라인들 창안이었다는 점, 8세기 중엽, 신라왕릉 호석구조에서 십이지신상으로 장엄하는 것이 가능해졌으며 이후 왕릉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 등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알아보았다. 이번호에서는 ‘전 진덕여왕릉, ‘구정동 방형분방형분’, ‘전 김유신묘’에서 보이는 십이지신상에 이어 성덕왕릉, 황복사 금당지, 경덕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 원성왕릉(괘릉), 능지탑 등 십이지신상의 형식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본 기사는 ‘경주 신라왕릉(2013년, 경주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발행)’과 고 이근직 교수(전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의 ‘신라 왕릉 연구(2012년)’에서 인용하고 발췌했음을 다시 한 번 더 밝힌다. -‘불교 미술 등에 조영된 십이지신상에 대해 일제강점기부터 연구 진행’ 고 이근직 교수(전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는 ‘신라 왕릉 연구(2012년)’에서 ‘호석구조에서 십이지신상으로 장엄하는 것을 포함해 불교 미술 등에 조영된 십이지신상에 대해선 일제강점기부터 연구가 진행됐으나 대부분 중국에서의 기원문제와 더불어 한반도의 전파 시기 또는 신라 십이지신상의 형식 및 양식의 특징을 중심으로 편년안을 제시하는 것이 주된 경향이었다. 그 중 강우방은 십이지신상의 편년과 함께 문헌 기록을 통해 능지탑의 십이지신상이 왕릉의 호석임을 밝히기도 했다’고 적었다. 또 ‘한편, 윤경렬 선생은 복식에서는 최초로 십이지신상이 배치되는 성덕왕릉을 근거로 무복이 평복에 앞선다. 조각 수법에서는 형식화된 것보다 사실적인 것이 앞선다. 조각 솜씨가 모두 같은 솜씨로 된 왕릉과 남쪽이 우수하며 북쪽으로 갈수록 소홀해지는 경향이 있는 왕릉 가운데 전자가 후자보다 앞선다’ 면서 ‘강우방은 통일기의 불교 조각과 마찬가지로 양식적인 측면에서는 고부조에서 저부조, 평면화로 이동하며 형식적인 면에서는 사실적에서 장식화가 강한 형식적인 측면으로 변했다. 또한 전체적인 느낌에서는 고부조이면서 강한 8세기의 모습에서 9세기로 갈수록 조형 정신이 약화되면서 약동감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고 했다. 이근직 교수는 이 두 견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임에 분명하다고 했다. -성덕왕릉... 시원적 형식 및 양식이며 화강암으로 조성된 환조 성덕왕릉은 능묘의 양식을 갖춰 조성된 신라 최초의 능으로 조양동에 위치하며 사적 제28호다. 성덕왕릉의 호석 둘레에는 별석을 이용해 환조로 조각한 십이지신상 11기가 대부분 두상을 일실한 채 서 있다. 그 가운데 온전하게 보존돼 온 신상은 일제 강점기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으며 오상은 신부가 두 동강이 난 채 나뉘어져 있다. 이러한 성덕왕릉 십이지신상의 중요한 특징은 시원적 형식 및 양식이라는 점과 화강암으로 조성된 환조라는 조각법에 있다. 그리고 이 왕릉 십이지신상의 무복은 같은 시기의 석굴암 사천왕상과 같은 형식을 따랐으며 지물은 보주와 도(刀)만으로 처리하는 단순함을 면치 못하게 된다. 도(刀)라 할지라도 몸의 일부분과 함께 표현되거나 또는 두 다리 사이에 짚고 있어 획일적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보주를 지물로 하는 경우가 4상이나 확인되는데 이후에 조영된 왕릉에서는 두 상 또는 한 상 만 보주를 지물로 선택한 것과 대비된다. 이러한 단순한 도상적 특징은 다음 왕릉에서 극복돼야만 했다. 이 왕릉의 십이지신상 역시 왕즉불 사상에 입각해 열반에 든 여래를 보호하고 있는 신장상인 것이다. 이는 왜 무기가 아닌 약사여래의 상징인 보주를 지물로 선택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진다. -황복사 금당기단지...다양한 지물의 등장 등 다양한 부분에서 발전 성덕왕릉과 달리 탱석에 주어진 네모난 공간을 활용하면서 십이지신상으로 조각할 수 있는 상황의 변화는 이후 다양한 발전을 가져오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 점은 복식과 무기의 표현에서 두드러진다. 성덕왕릉과 같이 두 손을 이용해 각각 무기를 잡은 예가 없다. 여기에서도 여전히 3상 또는 그 이상이 보주를 지물로 하고 있다. 다양한 지물의 등장이다. 보주와 같은 칼은 물론 도끼와 창, 창 끝 모양이 반달인 월아산도 처음으로 등장한다. 또, 가슴과 허리 라인을 S자형과 오상처럼 두 손 가운데 왼손은 옷 속으로 넣은 채로 외부에 노출 시키지 않도록 처리한 것이다. 그리고 두향은 모두 오른쪽이다. 이는 중국 당대 묘지명에 그려진 십이지신상의 그림과 일치한다. 이 십이지신상은 부조라는 전혀 다른 조각 방식을 채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성덕왕릉의 십이지신상을 일부 승계할 수 밖에 없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다양한 부분에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성덕왕릉의 사실주의 양식에 가장 근접하고 있어 여러 왕릉의 십이지신상 가운데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것을 증명한다. -원성왕릉(괘릉)... 무복 십이지신상 탱석에 직접 부조한 최초의 예 외동읍 괘능리에 위치하며 사적 제26호다. 신라인의 뛰어난 조각 수법이 남아있는 이 왕릉은 피장자가 확실하며 십이지신상은 무복으로 조각됐다. 이 왕릉의 무복 십이지신상은 탱석에 직접 부조한 최초의 예이다. 진상의 보주와 방천극을 제외하면 나머지 제상들에서는 두 손 모두 지물을 가진 경우가 없다. 아울러 무기의 종류에서는 이전 시기와 달리 다양하게 등장했다. 칼이 세 상으로 줄어드는 대신 다양한 종류의 창이 등장했다. 특히 오상의 화염문검은 십이지신상에서 처음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허리에 두른 띠 매듭 표현은 약화되고 있으나 천의 자락과 같은 모양으로 표현하는 방법은 더욱 강조되면서 옷소매의 표현도 장식성을 더했다. 보주는 진상만 가지고 있어 이전 시기의 왕릉에서 3상 또는 2상에서 보주를 들고 있던 것에서 점점 줄어든 것이다. 자상, 축상, 술상, 해상의 경우 십이지신상을 두른 10기의 왕릉 가운데 유달리 두 다리 사이의 폭을 최대한 넓게 표현하고 있다. -전 경덕왕릉...신상의 풍부한 두상, 유상의 긴 부리 등 특징적인 표현은 이전과 이후 왕릉에서 볼 수 없어 내남면 부지리에 있으며 사적 제23호다. 36개의 탱석 중 12개의 탱석에 12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무복을 입고 있으며 흥덕왕릉의 십이지신상과 흡사하다. 원성왕릉의 형식을 계승하면서도 많은 부분에서 파격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유상 이외에는 두 손 모두 무기를 잡은 예가 없으나 진상과 오상은 보주와 무기를 동시에 표현했다. 그리고 자상의 창끝과 같은 표현, 묘상의 금강저, 미상의 낫과 같은 모(矛), 해상의 촉루장은 처음 등장한 것이다. 몇 몇 두상에 대한 부분적인 표현은 매우 독특하다. 신상의 풍부한 두상, 유상의 긴 부리 등에 대한 특징적인 표현은 이전의 왕릉에서도 이후의 왕릉에서도 볼 수 없다. -헌덕왕릉...무복이 아닌 평복으로 표현했으며 새로운 양식으로 발전 북천의 북안 평지에 위치하며 사적 제 29호다. 판석과 판석 사이의 탱석에는 십이지신상을 양각해 놓았으나 현재 5개만 남아있다. 이들은 모두 평복을 입고 있으며 모두 우향을 하고 있다. 이 왕릉 십이지신상은 무복이 아닌 평복으로 표현해 이전 시기의 황복사지 동편 왕릉 및 전 김유신묘의 표현 방법을 중심에 두면서도 직전에 조영된 전 경덕왕릉의 형식을 일부 계승했다. 즉, 평복과 무복을 한 양쪽의 특징 가운데 필요한 부분을 취사선택하면서 새로운 양식으로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흥덕왕릉...양감 강하게 표현돼 있으며 부분적으로 형식화 돼 말기적 현상 드러나 흥덕왕릉은 신라 왕경에서 가장 면 곳인 안강읍 육통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적 제30호다. 복장은 모두 무복을 입고 있으며 양손 혹은 한 손에 무기를 들고 있으며 양감이 강하게 표현돼 있다. 흥덕왕릉에 이르면 십이지신상은 도상적으로 최고의 발전을 보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부분적으로 형식화 돼 말기적 현상이 드러나고 있다. 무복의 주름 치마에서 주름의 표현 회수가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는 형식화가 그만큼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 천의 자락이 이전 시기의 표현 방법에 더해 옷자락의 끝을 과장해 천의 자락의 효과를 나타냈다. -능지탑...인상, 진상, 사상, 해상은 남아있지 않아 배반동에 위치하며 경상북도 기념물 제34호다. 문무왕릉 비의 일부가 발견돼 문무왕의 화장터로 추정되기도 한다. 능지탑의 십이지신상은 동측면에 1기, 서측면에 3기, 남측면에 2기, 북축면에 3기가 설치돼 있다. 인상, 진상, 사상, 해상은 남아있지 않다. 능지탑 십이지신상의 용례는 원래 능지탑을 위해 조성된 것이 아니라 장소를 알 수 없는 신라 왕릉의 십이지신상이었는데 왕릉이 붕괴된 다음 십이지신상만 옮겨진 것이다. 능지탑 십이지신상이 호석 구조로 사용된 왕릉의 원래 위치를 현재로선 알 수 없으며 능지탑의 십이지신상은 전경덕왕릉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았다. 시기는 전 경덕왕릉 이후며 9세기 중엽의 왕릉에서 사용된 탱석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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