處暑 지나고 - 김춘수
處暑 지나고
저녁에 가랑비가 내린다
泰山木 커다란 나뭇잎이 젖는다
멀리 갔다가 혼자서 돌아오는
메아리처럼
한번 멎었다가 가랑비는
한밤에 또 내린다
泰山木 커다란 나뭇잎이
새로 한 번 젖는다
새벽녘에는 할 수 없이
귀뚜라미 무릎도 젖는다
-‘할 수 없이’ 젖는 귀뚜라미 무릎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는 처서 지난 지도 열흘 남짓 되었다. 백중(百中)의 호미씻이[洗鋤宴]도 끝나는 시기여서 “어정칠월 건들팔월”, 바야흐로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가을의 시작이다. 이때부터는 빗방울 굵기도 현저히 작아진다.
시인은 꾸준히 내리는 실비, 가랑비가 태산목 잎을 적시는 걸 본다. 태산목은 높이 20m, 회갈색 수피에 긴 타원모양의 잎을 가진 교목이다. 잎의 앞면은 윤기가 있고 뒷면에는 갈색의 털이 밀생한다. 윤기가 있으니 빗방울이 고여 비가 온 줄 알아차리기에 용이했을 것.
그러나 ‘泰山木’은 실제 나무라기보다 시인이 만들어낸 조어(造語)이다. ‘커다란 나뭇잎’과 두 번(3행, 7행)이나 함께 쓰인 데서도 드러난다. 이는 ‘귀뚜라미 무릎’과 대조된다. 각각 극대화, 극소화된 사물이다. 그 두 가지 대상이 젖는 모습을 시인의 눈은 의도적으로 따라간다. 먼저 가랑비가 새로 내리는 모습을 “멀리 갔다가 혼자서 돌아오는/ 메아리처럼”이라는 낯설고 신선한 직유를 통해 표현함으로써 묘사의 아름다움을 배가시킨다.
다시 내리는 비 = 멀리 갔다가 혼자서 돌아오는 메아리
이 묘사에서 우리는 시간감각을 공간감각으로 옮겨놓는 시인의 탁월한 묘사능력을 볼 수 있다. 저녁과 한밤의 시간적 차이는 멀리 갔다가 돌아오는 메아리의 공간으로 변주되어 전달된다. 그뿐이 아니다. 저녁에 내린 비에는 매우 커다란 나뭇잎이 젖지만, 한밤에 내린 비에는 그 나뭇잎이 새로 한번 젖고, 새벽녘에는 작디작은 미물 귀뚜라미의 시린 무릎마저, 놀라워라, “할 수 없이” 젖는다는 것이다. 끈질긴 가랑비의 사물 완전 정복이랄까. 가장 큰 것도, 가장 작은 것도 계속해서 내리는 세우(細雨)에 젖는다는 시인의 사유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과도 통한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물에 대한 자기 식의 언어 만들기가 두드러지는 이런 시를 보면, 왜 사람들이 김춘수를 언어의 대가라 부르는 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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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은 시인 약력
경북 안강 출생
1987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5 매일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고요 이야기』, 저서 『서정주 시의 시간과 미학』외 7권, 1996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경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