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께서는 늘 입버릇처럼 ‘생전, 사후 늘 너만 믿는다’고 하셨어요” 천상 태생적인 명문가 종부다. 자신을 늘 채찍질하고 겸손함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가문을 선양하고 종부의 삶 전체를 고스란히 진화시켜 전수하고 있는 신세대 종부가 있다. 바로 이천서씨 경주 종가의 33세손 권순미(50) 종부다. 박제화된 종부의 삶을 반전시켜 트렌디한 시류를 잘 접목시키고 있었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기분좋게 쏟아지던 지난 2일, 벌초를 앞두고 장을 보러 가야 한다며 마음 분주한 권순미씨를 현곡면 소현리에 있는 이천서씨종택(利川徐氏宗宅)에서 만났다. 이 종택은 이천서씨의 전국 종가 집으로 소현리 ‘밖마을’에 있다. 종가와 부조묘, 영당이 함께하는 종택에는 2년전 시어머니(장자남)가 작고한 이후로, 33세손인 종손 서세붕씨 부부가 삼남매를 두고 함께 생활하고 있다. 단아한 생활 한복이 잘 어울리는 그에게선 종부로서의 자긍심과 사명감이 배어 나왔다. 아담한 체구와 가녀린 눈매에는 재기가 넘쳐흘러, 당차고 어여쁜 여자라는 느낌을 준다. 고리타분한 원론으로서의 유가 방식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유가의 긍정적 가치를 현대적으로 풀어내고 재조명해 활용하고 있는 종부였다. 두부찌개도 할 줄 몰랐던 그가 이제는 인기 요리 프로그램에 섭외돼 출연(2013년 한 케이블 방송의 요리 서바이벌 유명프로그램인 ‘한식대첩2’에 출전해 우수한 성적 거둠)할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이 종택 뒤뜰에는 조선 태종 때 박포난에 공을 세우고 예조판서를 지낸 좌명공신(佐命功臣) 양경공(良景公) 서유(徐愈)를 모신 부조묘(불천위 제사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 둔 사당)영당이 있다. 종택의 면면들은 아름다운 건축물로도 손꼽힐만큼, 자태와 고아한 운치는 빼어났다. 후손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사당은 전통을 상징하고 리모델링한 효우당(孝友堂)은 세련된 인테리어로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시간성과 정신성, 현대 종가의 스토리와 품격이 배어있는 공간이었다. 눈에 거슬리는 그 무엇도 없는 자연스러움과 고색(古色)이 공존하는 이런 가문을 경주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안동 권씨 죽림 공파 35대 종가에서 태어나 이천 서씨 양경공파 33세손에게 시집 와 권순미 씨는 강동면 국당리 출신으로 안동 권씨 죽림 공파 37대손으로 태어나 이천 서씨 양경공파 33세손에게 시집왔다. 친정 부친의 권유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치매로 오랜 투병 중이었던 친정할아버지 수발을 들게 됐다. 병문안을 오시던 집안의 여러 어르신들이 워낙 깔끔하게 봉양을 하던 권씨를 눈여겨 보게 되고 소문이 나던 차제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여전히 학원을 운영하면서 바쁘게 생활 하고 있는데, 서씨 집안에서도 문상을 왔고 지금의 남편과 두 번의 맞선 끝에 서른 하나에 결혼한다. 발랄했지만 음전한 아가씨였던 그에게 친정 부친은 “지 하나 뚜렷하게 잘난 남자, 즉 허허벌판에 잘 생긴 나무 한 그루 떡하니 서있는 남자를 네가 원할 수 있지만, 그런 나무는 비바람을 자주 타고 시기를 받는다. 반면,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는, 예를 들어 문중이 있고 집안 간 큰 숲을 이루고 있으면 그 자체로 큰 배경이 될 것이다. 네 혼처로는 조상들의 음덕이 있는 집안의 자제였으면 좋겠다. 너는 큰 집안의 종부감으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종용했다고 한다. 부친의 권유는 스며들듯이 ‘집안’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고 지금의 남편을 만난 큰 줄기였다고 했다. -효우당(孝友堂)...불천위 당호로 600년 넘는 종가 당호 이 종택의 당호는 효우당(孝友堂)으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 있으라’는 의미다. 효우당 당호는 600년 넘는 종가의 당호이며 지금의 건물은 60년 여 되었다. 권씨는 “우리 가문은 양경공파이기는 하지만 이천 서씨 전국 종가가 바로 저희 집입니다. 예조 판서를 지낸 서유 할아버님께 조선조 태종이 당호를 하사하면서 3대 봉군을 받았고 국불로 불천위 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국불로 불천위를 지내는 곳이 경주에는 여러 종가가 있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고 했다. -“심지어 대제 지내는 중 아이 젖 먹이다가 곯아 떨어진 적도 있었어요” 권씨에게 시어머니 이야기는 빠질 수 없다. 오늘의 당당한 종부로서의 권씨를 있게 한 사표(師表)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시어머니는 ‘열일곱에 시집 와 청춘에 혼자 된 이’로 고생이 많았던 만큼 강한 이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남편(서정기 선생)이 행방불명 된 이후 혼인 당시 17세부터 88세까지 혼자 이 집안을 지켜냈으니 그 고충이 짐작이 가고도 남는 대목이다. 후손이 없어 작은집에서 지금의 권씨 남편(서세붕 씨)이 양자로 들어오게되고 어렵게 지켜온 이 집안을 맡길 적임자로 마음만 좋은 아들을 보완해줄 수 있는 똑부러지는 권씨에게 며느리가 돼 줄 것을 적극 권했다고 한다. “이런 시어머니라면 종부의 삶을 배우고 싶다는 판단을 했죠. 시어머니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결혼해서 일처리를 제가 많이 했어요. 중요한 일을 판단하거나 모든 악역은 제가 담당했죠(웃음). 살면 살수록 시어머니를 닮아간 듯해요. 시어머니는 늘 입버릇처럼 ‘생전 사후 늘 너만 믿는다’고 하셨어요. 책임감이 느껴졌고 곱절 잘 해내고 싶었습니다” 권씨는 시집살이도 호되게 살았다. 결혼을 하고 일을 그만두었으나 부부가 마땅한 벌이가 없어 학습지 회사일을 시작했다. 첫 아들을 낳고 일을 다니며 아이를 키우고 밤 10시가 넘어서도 인근에 있는 밭농삿일(거름 뿌리는 일, 수확하고 약 치는 일 등)을 도맡아 하는 등 돈 벌고 살림하고, 밭일 하고 제사 모시고 정신없이 살아왔다고 한다. “심지어는 대제 지내는 중 아이 젖 먹이다가 곯아 떨어진 적도 있었어요. 너무 힘들어 허리를 못 쓴 적도 있을 만큼 억척스럽게 일을 해냈죠. 어머니와 우리 부부가 그렇게 열심히 살아온 덕인지 최근 경제적으로도 나아져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개인적 영달보다 가문 위해 희생하셨던 시어머니에게서 큰 감화 얻고 종부의 삶 버틸 수 있는 동력 돼 “‘대제’, 즉 양경공 서유 영당의 할아버지 제사를 ‘큰제사’라고 하며 일년 중 가장 큰 행사입니다. 일년에 두 번 모시고 있죠. 대제를 포함해 기제사, 명절 제사 합해 12번을 모시고 있습니다. 대제때는 집안에서 여러분들이 오셔서 문중유사와 함께 장을 보는 일부터 진행되는데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많이 간소화 된 편이예요. 그 전에는 한 달 전부터 제물 준비를 했었죠. 직접 재배하고 수확한 재료로 모든 제물을 장만했거든요”라며 전과, 유과, 녹두 찰편, 약과 등도 손수 장만했고 제사 한 달 전부터는 잠도 못 잘 정도였고 제사 모신 후에는 음식을 보관하고 나누고 음복 보내는 것도 큰일이었다고 했다. “전에는 힘들다고만 생각했다면 지금은 조상을 잘 모시는 것이 제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종가에만 내려오는 음식과 생활전통 등에 대해서 다음대에 전수해 줄 비법을 제대로 만들고 전수하고 싶습니다” 이 종가의 전수 음식으로는 ‘집장(여름철 고두박 수확시기에 콩을 삶아 절구에 찧어 말린 뒤, 약간의 발효를 거친 뒤 갖은 야채를 버무려 단지에 넣어 한지를 발라 두엄 아래 일주일 정도 띄운 장)’과 고두박으로 만든 전과, 제사 지낸 후 문어와 잣 등을 이용해 만드는 ‘수란채’ 등이 있다고 한다. “눈물도 많이 흘렸고 지금 생각해도 눈물 나요. 경제적으로도 종가 살림이 힘들었던 적도 많았어요” 권씨에게도 누구나 겪을 법한 결혼생활에 대한 갈등과 회의가 많았지만 삼남매를 키우며 마냥 행복했고 시집오면서부터 어른과 함께 생활하면서 일어난 수많은 사연들은 오늘의 권씨를 영글게 했다. 개인적 영달보다 가문을 위해 희생하셨던 생전의 시어머니 모습에서 큰 감화를 얻었고 그것이 종부의 삶을 버틸 수 있는 동력이 됐다고 한다. 또, 고비때마다 친정 부친의 위로와 격려도 큰 힘이 됐다. -젊은 세대들 종가 좋아할 수 있도록...“이제는 종부들도 경쟁력 있어야 합니다” “아직 나이도 많지 않고 시집을 그리 오래 산 건 아니지만 젊은 세대들이 종가를 좋아할 수 있도록, 선택받은 느낌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집을 좀 더 편리하게 리모델링했어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력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종부로서 정신적 물질적 이중고를 겪는 셈이니까요. 이제는 종부들도 경쟁력이 있어야 합니다. 종부라는 콘텐츠를 활용해 종부로서 인정받고 경제적 이익도 창출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라면서 힘든 시집살이와 최선을 다해 종부로 살아온 것이 어느새 자산이 돼 보상으로 되돌아오는 것 같다고 했다. 권씨는 현재 부산 경성대학교 대학원에서 호텔경영외식조리학과에 수학중이다. 늘 해오던 종가 음식이라 그 가치를 잘 모르고 있었는데 종가 요리의 체계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터였다. “학문적으로 부족한 부분에 대한 보완으로 종가 음식을 이론화해서 후학에게 가르치고 싶습니다. 자라나는 후학들에게 조금이라도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어른으로서 종가의 삶과 요리 등을 체계화 해보고 싶어요. 박사 과정까지 염두에 두고 있으며 80세 까지 일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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