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석불 주변지역에 대해 1910년대에 일본인들이 처음 조사를 하였다. 이후 1981년 국립경주박물관에 의하여 다시 발굴조사를 한 결과 창건 당시에 이 사면석불을 모시는 건물이 있었으며 이 건물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의 어느 시기까지 존재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이후 본격적인 조사는 1985년 국립문화재관리국 경주발굴조사단에서 실시하였다. 발굴 결과 서쪽에 있는 삼존불의 연화대좌를 찾아내고, 동쪽 면 약사여래의 무릎 이하 부분이 드러나 불상의 전체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굴불사의 전체적인 모습은 계곡부의 경사면을 잡석으로 메워서 땅을 고른 후 큰 바위를 옮겨와 불상을 새기고 그 주위에 건물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이 새겨진 돌이 동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는 것은 지반의 약화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건물은 정면을 남쪽으로 하고 앞면 3칸 이상에 옆면 3칸의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발굴 당시 조선시대 기와가 수습되어 이 건물이 조선 중엽에 이르기까지 목조기와의 건물이 존재하였음이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층위(層位)에서는 ‘동사(東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를 비롯하여 많은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이 통일신라 경덕왕 때 ‘굴불사’로 창건되었다가, 고려시대 한때 ‘동사’로 절 이름이 바뀌고,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할 당시에는 ‘굴석사’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때 발굴된 유물로는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짐작되는 금동여래입상 1점과 청동 종 2점, 청동 금고 1점, 청동 향완 4점, 기타 청동제 유물 16점을 수습했다. 이 유물 중 금동여래입상은 높이가 12cm, 좌대 높이 3cm로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불상 표면의 금박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었다. 또 청동 종은 전체 높이가 45cm, 입지름이 13.9cm의 크기이며 종 표면에는 비천상(飛天像)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었다.
지금 ‘고려시대의 경주’라는 주제로 국립경주박물관에서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데 당시 이곳 굴불사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확인할 수 있다. 특별전 기간은 9월 4일까지이니 관심이 있는 분들은 서둘러야 할 것이다.
이 출토 유물들은 고려 때 몽고의 침략으로 승려들이 사찰을 떠나면서 묻었을 것이다. 이후 조선 숙종 때 다시 불사(佛事)가 이루어져 약100년 동안 법등(法燈)이 이어지다가 이후 폐사되면서 사면석불은 대부분 자연적으로 매몰되고 일부만 지상에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