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난 11일 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절차에 관한 법률(이하 ‘관리절차법’) 제정안을 입법예고한지 3주째 접어들면서 미묘한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정부 계획 발표 직후 경북도의회 원전특위와 경주시의회가 기본계획안 반대 결의안을 채택하는 등 즉각적인 반대의사를 표명했던 것과는 달리, 정작 여론수렴 시기인 입법예고 기간에는 오히려 잠잠해서다. 이러다 중·저준위에 이어 고준위 방폐장까지 경주에 들어오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우려 속에 일각에서는 정부 계획의 불가피성과 적절한 보상 필요성 등 현실론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도 감지되고 있다. 앞으로 월성원전의 고준위방폐물 문제는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정부가 발표한 고준위방폐물 관리 계획 및 절차법의 주요 내용과 경주에 미칠 파장을 진단해본다. -38년 만에 나온 최초의 관리절차법, 경주 고준위방폐물 반출 법적 근거 이번 관리절차법은 지난달 25일 제6차 원자력진흥위원회에서 확정된 ‘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을 차질 없이 실행하기 위한 과학적이고 민주적인 절차와 방식을 담은 법·제도적 장치라는 것이 산업통상자원부의 입장이다. 1983년 우리나라가 고준위방폐물 관리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한 이래 9번의 부지선정 무산 경험을 거치면서도 확정하지 못했던 고준위방폐물 관리절차를 지금에라도 마련했다는 것은 분명 그 자체로 의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발전소 내 저장시설 포화를 앞두고 국가적 당면현안으로 자리한 고준위방폐물 관리의 법적 근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저준위 방폐장을 유치하는 지역에 사용후핵연료의 관련시설을 둘 수 없다는 ‘중저준위방폐물 처분시설의 유치지역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18조의 실행력을 담보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는 셈이어서 경주시민들의 뜨거운 관심사항이기도 하다. 그동안 특별법 조항에도 불구하고 고준위방폐물을 발전소 내 저장시설에 보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고준위방폐물 관리정책 관련 법·제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관리절차법이 국회를 통과하면 향후 고준위 방폐물 관리 정책은 크게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특정부지 예단하지 않는 5단계 부지선정 절차 및 소통 강조 관리절차법의 주요 내용 가운데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그동안 정책실패의 결정적 배경이었던 특정부지를 예단하거나 일방적으로 부지선정 절차를 주도하지 않겠다는 점을 정책으로 명시하고 법적으로 명문화한 점이다. 5단계의 부지선정 절차는 과학적 조사와 민주적 절차를 명시하고 있다. 1단계는 전 국토 중 관리시설 입지로 부적합한 지역을 제외하는 부적합지역 배제단계다. 2단계는 유치에 적합한 지역의 지자체를 대상으로 공모하는 부지공모 단계이고, 3단계는 대상부지에 대한 엄밀한 기초조사와 부지특성·적합성을 평가하는 기본조사 단계다. 다음 4단계는 기본조사를 통과한 지역을 대상으로 주민의사를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절차를 실행하는 주민의사확인 단계이고, 마지막 5단계로 주민의사가 확인된 부지에 대한 엄밀한 심층조사를 거쳐 확정한다. 이와 함께 부지선정 업무의 객관성과 전문성을 담보하기 위해 민간 전문가로 구성된 ‘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위원회’를 설치·운영하도록 한 점도 과거 정부주도의 일방적 정책추진의 문제점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더불어 전문적·과학적 사안에 대한 관리위원회의 의사결정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사전에 심층 검토를 담당할 전문위원회를 운영하도록 한 점도 과거 유사한 위원회의 전문성 논란을 고려한 보완장치로 파악된다. 또한 관리위원회의 원활한 작동을 위한 실행기구도 명시했다. 관리위원회의 안건 준비 등 사무지원을 위해 사무기구를 설치하고, 조직과 구성 등 구체적인 운영 관련 사항은 시행령에 위임하도록 해 실무적 지원방안도 고려한 것이다. 특히 정부가 누차 강조한 대국민 소통과 투명한 정보공개를 담당할 소통감사실 설치 등이 가능하도록 한 점도 향후 논란을 줄여줄 안전장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지난 6월 방한한 C.Xerri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연료주기 국장이 “고준위방폐물 정책은 기술뿐만 아니라 ‘공공의 신뢰’와 ‘지역민들과의 이해형성’이 매우 중요한데 한국의 고준위방폐물 관리 기본계획은 이 사항을 충분히 고려했다”고 평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부주도형에서 벗어나 정책의 개방성 담보 일각에서 의혹을 표명한 주민의사 확인절차와 산업부장관 직권으로 부지조사를 상정한 것에 대한 산업부의 입장은 분명하다. 주민투표는 유치지역 주민의 의사를 확인하는 유용한 방안의 하나이지만, 구체적 확인방식과 내용 등은 부지선정 조직이 논의해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주민투표법 제8조에 따르면 중앙행정기관의 장은 국가정책 수립에 관한 주민의견을 듣기 위해 관계 지방자치단체의 장에게 주민투표 실시를 요구할 수 있도록 돼 있다. 물론 지난 2005년 중·저준위방폐장 부지선정을 위한 주민투표 당시 경주는 89.5%의 압도적인 찬성률로 유치를 결정했지만, 중앙정부 주도형 주민투표의 적절성에 대한 논란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부가 이번 절차법에는 원칙만 명시하고 구체적 방법론에 대해서는 부지선정조직이 결정토록 한 것은 정부주도형 일방적 정책집행에서 벗어나 정책의 개방성을 확보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산업부장관 직권 부지조사를 상정한 것과 관련해서는 2004년 당시 절차처럼 대상지역 공모에 참여가 없을 경우에 대비한 예비적 차원이라는 것이 정부 설명이지만, 지역에 대한 충분한 설명과 협의 등을 통해 지역의 참여를 유도해서 직권조사 가능성은 최대한 피한다는 것이 정부 입장이라 현 상황에서는 쟁점에서 벗어나 있다. -국무총리 소속 유치지역지원위 구성 등 법적 책임성 강화 이밖에 지역지원에 대한 중요사항을 심의하는 ‘유치지역지원위원회’를 국무총리 소속으로 설치하고, 부지 확보 후 관리시설의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관리시설별 위치, 규모 등 시설개요와 건설일정, 저장 또는 처분방식 등 관리시설 건설계획을 수립하도록 했다. 또 지하연구시설을 설치해 실증과 실험 결과를 토대로 처분시설을 건설하고, 필요한 경우 해외 관리시설을 건설·운영·이용하기 위해 해외국가 또는 기관과 협력할 수 있는 근거를 신설한 점도 주목받고 있다. 고준위방폐물 관리는 원전 보유국 모두의 현안인 만큼 국제원자력협력체제(IFNEC) 등에서도 국제적인 논의가 진행 중이다. 국제 공동저장시설 논의가 이뤄진 호주의 경우, 남부호주 주정부기관인 왕립핵연료순환협의회(Nuclear Fuel Cycle Royal Commission)가 다른 나라에서 발생한 고준위방폐물을 자국 내에 저장·처분하는 관리시설의 설치에 대한 검토 보고서 초안을 발표한 바 있다. -월성 건식저장시설 확충과 관리절차법의 복잡 미묘한 관계 관건은 월성건식저장시설 확충 문제다. 건식저장시설은 1990년대부터 미국, 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 두루 검증된 고준위방폐물 저장방식이다. 안전성은 물론 확장성도 좋고 관리부담도 적어 세계 각국에서 선호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2년부터 월성원전에 적용되고 있다. 법적으로는 원자력안전법(원안법)에 따른 ‘원자로 관계시설’이다. 그동안 관계시설이냐 관련시설이냐는 논란이 있었지만, 2015년 10월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원전 내 건식저장시설을 원자력안전법상 관계시설이라고 유권해석 했다. 법적 논란은 종식됐다는 의미다. 고준위방폐물인 사용후핵연료는 사용전핵연료를 포함해 원안법상 핵연료물질이므로, 월성원전 안에 있는 건식저장시설은 핵연료물질의 저장시설로서 관계시설에 해당된다는 것. 따라서 오는 2019년부터 포화예정인 월성원전 건식저장시설의 추가 건설은 이번 고준위방폐물 관리절차법이 아닌 원안법에 의거해 추진하게 된다. 건설 주체 또한 엄격히 규정하자면 원자로 관계시설의 운영과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원자력발전사업자다. 다만 지난달 정부가 확정한 고준위방폐물 관리 기본계획에서 ‘고준위방폐장 건설 전 발전소 내 저장시설이 포화 예정인 원전지역의 건식저장시설 설치와 관련한 지역지원 문제에 대해 합리적으로 지역과 협의해 정한다’는 원칙을 담았으므로, 이 점이 입법 이후 건식저장시설 설치 논의과정에서 핵심쟁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관리절차법에 명시된 사용후핵연료 관련 시설의 조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관리절차법에 따르면 ‘중저준위방폐물 처분시설의 유치지역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18조의 사용후핵연료 관련시설은 별도의 부지선정 절차를 거쳐 원전 외부에 설치되는 중간저장시설, 영구처분시설 등을 의미한다고 돼있다. 전문가들은 이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진단한다. 발전소 부지에 건설되는 건식저장시설은 개념적으로나 실체적으로 영구처분시설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정부도 그동안 논란과 오해를 유발했던 개념에 대해 명백히 규정하고 합리적 지원원칙을 분명히 했으므로, 현재 입법예고중인 관리절차법이 조속히 법제화돼야 원안법처럼 근거법이 돼 여러 쟁점을 해소할 수 있게 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현행법상 경주지역에 고준위방폐장이 들어설 수 없으므로, 경주에 고준위방폐장도 들어서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는 말 그대로 우려일 뿐이고, 현재 남은 쟁점은 건식저장시설 설치 여부와 고준위방폐물 보관비용 등 적절한 보상 문제인 점을 감안하면 더욱 법적·제도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다행스럽기는 하지만, 실제 협상에 들어가면 풀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 -대안 없는 반대 넘어 결국 소통의 문제 정부에 따르면 고준위방폐장을 짓기 전 가장 먼저 포화예정인 원전은 경주 월성원전이다. 건식저장시설 건설 기간 등을 고려하면 2019년 포화시점까지 남은 3년은 짧은 기간이다. 흔히 정부의 태도와 그간의 실책을 질타하지만,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현 상황의 주도권은 정부가 아니라 지역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이해관계가 첨예한 사안일수록 태도를 문제 삼기보다 정부가 명시한 법적 근거 등 구체적 사안을 가지고 명분과 실리를 챙길 것을 주문한다. 특히 정부가 소통을 강조하고 있는 만큼 소통을 위한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효과적 방법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남은 입법예고 기간이 더욱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지역의 중지를 모아 구체적으로 경주시민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고 그동안 감내한 부담을 해소할 수 있는 실질적 방법을 마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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