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제35대 경덕왕이 백률사에 거동해서 산 밑에 이르렀더니 땅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하게 생각한 왕이 그곳을 파게 했더니, 큰 돌이 있는데 사면에 사방불(四方佛)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굴불사라고 했으니 지금은 잘못 전해져서 굴석사(掘石寺)라 한다”
이곳 사면석불과 관련하여 『삼국유사』 「탑상」편 ‘사불산굴불산만불산(四佛山掘佛山萬佛山)’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탑상」편 같은 조 사불산 이야기에서는 죽령 동쪽 지금의 문경 땅에 진평왕 9년(587) 사방불이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붉은 비단에 쌓여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하는데 땅 속에 있었다는 이곳 굴불사지 사면석불과는 대조적이다.
또 이와 관련하여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은 이곳에서 멀지 않는 금강산 동쪽 끝자락에 있는 전 도량사지이다. 도량사는 사복(蛇福)을 위해 세운 사찰로 사복은 어머니 시체를 업고 땅 속 연화장 세계로 들어갔다는 스님이다. 경덕왕이 이곳 땅 속에서 염불소리를 들었으니 당시 신라 사람들은 금강산 지하에 연화장 세계가 있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AD 1세기경 대승불교가 발생하면서 한 시대에 한 명의 부처만 존재한다는 기존 개념이 동서남북 사방은 물론 6방, 8방에도 존재하고 과거는 물론 현재와 미래에도 부처가 존재한다는 개념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망라하여 모든 세계에 존재하는 부처들을 시방삼세제불(十方三世諸佛)이라고 하며 특히 밀교 계통에서 발전하였다.
굴불사는 사방불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여 세워졌던 절이다. 사방불은 시대에 따라, 또는 경전이나 종파에 따라 그 명칭이 달라 매우 복잡하다. 금광명경 의하면 동방의 묘희국에는 아촉불, 서방 극락국에는 무량수불, 남방 환희국은 보상불, 북방 연화장장엄국은 미묘성불이 각각 배치된다. 공작왕주경이 약사신앙과 함께 유행하면서 동방에 약사불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사방불 사상이 더욱 발전한 밀교의 경전인 금강계의 금강정경에는 동방 아촉불, 서방 아미타불, 남방 보생불, 북방 불공성취불로 구성되어 있다. 반면에 대일경을 근거로 한 태장계에는 동방 보당불, 서방 무량수불, 남방 개부화왕불, 북방 천고음불로 되어 있다. 사방불의 존명은 이와 같이 모두 다르나 서방의 아미타불만 항상 일정했음을 알 수 있다.
8세기 이후에는 신라에서 약사신앙과 화랑들에 의해 신앙되던 미륵신앙이 널리 퍼지면서 사방불이 동 약사불·남 미륵불·서 아미타불·북 석가모니불로 재편되었고 중앙에는 비로자나불이 자리 잡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확인되고 있는 사방불의 경우 동방 약사불, 서방 아미타불은 거의 고정적이나 남과 북은 미륵과 석가 혹은 석가와 미륵 등 일정하지 않으며, 밀교 경전에서의 사방불과는 더더욱 일치하지 않는다. 이는 당시 불교신앙이 독창적으로 반영된 결과로 판단된다. 굴불사지의 사면석불은 동방에 약사여래, 서방은 아미타삼존불, 남방과 북방의 불보살상은 존명이 확실하지 않다.
경주 지역에서 사면에 불상이 표현된 경우는 이곳 굴불사지 사면석불을 포함하여 남산 탑곡마애불상군, 칠불암 사면석불, 경주경찰서 앞뜰 석탑 2기의 사방불, 동천동 석탑사방불, 국립경주박물관 석탑 5기에 새겨진 사방불, 안강 금곡사지 사방불, 경주 호원사지 사방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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