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저녁밥을 먹고 무거운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나날이 계속되는 불볕더위로 숨쉬기조차 힘이 든다. 나이 탓인지 예전보다 더 견디기가 어렵다. 또 신문과 방송에서는 연일 듣기 싫은 소식뿐이다.
거기다가 하버드대학 출신인 미국인 현각스님이 우리 한국 불교계가 지나치게 돈만 밝히고, 외국인 스님을 장식품으로 생각하는 현실에 실망하여 한국을 떠나겠다고 한다. 이런저런 것으로 몸과 마음이 두루 지친다. 이스라엘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의 왕이었던 다윗이 세공기술자를 불러 명했다.
“나를 위해 아름다운 반지를 하나 만들되 거기에 내가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환호할 때 교만하지 않게 하고, 내가 큰 절망에 빠져 낙심할 때 결코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글귀를 새겨 넣으라.”
세공인은 아름다운 반지는 만들었지만, 정작 거기에 새길 글귀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고민 끝에 지혜롭기로 소문난 다윗왕의 아들인 솔로몬을 찾아가 다윗왕의 명령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왕자 솔로몬이 세공인에게 다음과 같은 글귀를 일러주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견디기 힘든 이 더위도 멀지 않아 저 멀리 물러가리라. 그리고 신문이나 방송에도 좋은 이야기가 더 많아질 것이라 기대해 본다.
시청 뒷길인 백률로를 지나 포항 울산 간 산업도로와의 교차로를 건너 왼쪽으로 가면 최근 조성한 주차장이 있다. 이곳에서 산 위 백률사 쪽으로 50여m를 가면 오른쪽에 굴불사지 사면석불에 이르게 된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시각인데 주위에는 단지 여인 두 사람의 그림자만 보인다.
중년의 한 여인은 불상 앞에 놓인 향로와 정화수 받침을 정성스레 닦고 있다. 또 다른 한 젊은 여인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경건하게 사면석불 둘레를 돌고 있다. 탑돌이가 아닌 불상돌이를 하고 있다. 산새도 일찍 보금자리에 들었는지 적막하다. 부처님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여인이 살그머니 북면 약사여래상 앞에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는 약사여래의 왼손 손바닥 위에 놓인 약합을 조용히 쓰다듬고는 그 손으로 다시 자신의 배를 문지른다. 자세히 살펴보니 배가 무척 부르다. 임신한 몸이 분명하다. 뱃속에 든 태아를 위해 축원을 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등 뒤로 멀찍이 현수막이 어지럽게 걸려있다. ○○대학교, ○○사관학교, 교원임용고시, 행정고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것들이다. 약사여래상 앞에 축원을 드리고 있는 이 여인 또한 먼 훗날 자신의 태어날 아이에 대한 현수막도 마음속으로 걸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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