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건천의 금척리 고분군은 경주 중심부의 황남동, 노동동, 노서동, 황오동, 인왕동, 교동 일대에 넓게 분포하는 고분군을 제외하면 경주 주변 외곽에서는 고신라시대의 대형봉토분들이 가장 많이 밀집해 있는 고분군이다. 고분들이 분포한 곳은 북서의 아화에서 경주 분지의 서쪽 입구에까지 연결되는 건천(乾川)에 의해 형성된 서북에서 동남으로 이어지는 작은 분지 형태의 평야 가운데 약간 남동으로 치우친 지점에 위치한다. 일제 강점기 52기의 봉토분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는데 현재는 30 여 기의 대소고분이 확인되고 있는 이 고분군 일대는 1963년 사적 제43호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다. 개망초와 루드베키아 등의 야생화들이 한여름의 고분군들을 화사하게 하고 있었다. 신험한 황금자가 이 고분군 어딘가에 감춰져 있을 거라는 기분좋은 상상에 살짝 설레기도 한다. ‘금척’이라는 희망과 소원성취의 매개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이 고분군을 더욱 정감있게 보이게 하는 장치인 듯 했다. 고분군은 외형상으로는 대부분 원형토총이며, 원형토총 2기가 맞붙어 있는 표주박형 표형분(瓢形墳)도 있었다. 모두 경주시내의 대릉원 등에 위치한 대형 고분들보다는 규모가 작다. 이 고분군은 세 차례에 걸쳐 부분적으로 발굴이 이뤄졌다. 금제귀고리, 곡옥장식목걸이, 은제허리띠 등이 출토돼 삼국시대 귀족이나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척고분 공원 입구쪽에는 이곳 출신의 경주 문학의 대부 구림 이근식 선생의 시비가 조성돼 있어 눈길을 끌었다. -금척...삼기팔괴(三奇八怪)의 삼기(三奇) 중 하나 금척은 경주의 진기한 세가지 보물과 여덟가지 괴상한 풍경으로 해석되는 삼기팔괴(三奇八怪)의 삼기 중의 하나로 포함하는 학자가 많다. ‘백률사 설화와 제영에 대한 연구’ 논문에서 강석근(동국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는 ‘김정균의 편저 ‘경주고적시문화록’에서는 삼기팔괴중 삼기는 금척, 옥적, 성덕대왕신종이라고 했으며, 김영기의 ‘신라 문화와 경주 고적’에서는 경주의 삼기를 금자, 옥피리, 분황사의 화주라고 했으며, 권오찬의 ‘신라의 빛’에서는 삼기를 금척, 옥적, 성덕대왕신종이라 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들 모두 삼기에 이 고분군의 금척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고분 대부분이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 고분군 조성은 5세기∼6세기중반으로 추정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남아 있는 봉토분들은 대부분 원형의 단독분으로 보이나 몇 기의 표형분(瓢形墳)도 확인된다. 또 많은 고분의 봉토 윗부분에서 함몰된 형상을 찾을 수 있어 대부분이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봉토는 직경 25m 이상의 크기를 가진 것들도 있어 신라의 지방 고총들과 유사한 크기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봉토분들 가운데 1952년에 3기(30호분∼32호분)의 고분이 발굴돼 금귀걸이·곱은옥 등이 출토된 바 있고, 1976년 고분군 사이의 밭에서 소고분들이 발견돼 문화재관리국 경주사적관리사무소가 주관해 발굴한 바 있다. 1981년에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의해 상수도 부설공사 중 확인된 고분군 보호구역의 남쪽 한계선 외측의 8기가 조사됐다. 속전에 의하면 “이 고분들 가운데 하나에는 박혁거세(朴赫居世)의 금자(金尺)가 묻혀 있어 이곳이 금척리라고 명명되었다” 하는 것으로 보아 고신라시대 초기부터 이곳에 고분군이 조영되기 시작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조사된 고분들은 돌무지덧널무덤이 주류를 이루며 그밖에 덧널무덤, 독널무덤, 돌덧널무덤 등도 혼재했다. 그러나 봉토가 남아 있는 대형분은 모두 돌무지덧널무덤이었다. 출토된 유물로는 금제귀고리, 곡옥장식목걸이, 은제허리띠 등이 있는데, 이러한 조합상은 신라 지방 고총들에서 출토되는 양상과 유사하다. 출토된 유물들로 보아 고분군이 조성된 중심 연대는 5세기∼6세기중반으로 추정된다. 고분군의 남측에는 모량(牟梁)이라는 옛 지명이 남아 있어, 금척리 고분군을 신라의 6부 가운데 하나인 모량부 귀족들의 무덤들로 보는 견해도 있다. 모량부는『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24대 진흥왕의 왕비인 지소부인 또는 식도부인 박씨의 출신지로 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신라의 중앙정계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던 집단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고분의 크기, 묘제, 입지 등이 합치된다는 것이다. 비록 규모에 있어서는 경주 평지의 최대형 분들보다 작으나 대형인 점, 고분들이 위치한 곳이 평지이고 발굴조사된 고분들의 경우 경주 중심부의 평지에 조성된 것과 같은 돌무지덧널무덤인 점, 그리고 출토유물의 양식에 있어서도 별 차등성이 인정되지 않는 점 등이 그것이다’고 정리한다. -죽은 사람도 그 자를 대면 회생하고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금척’...진평왕, 당나라에 뺏기지 않으려 고분군 만들어 감춰 금척고분에는 전설이 서려있다. ‘단석산 아래 마을 이야기(1994년, 도서출판 서라벌)’에서 황종찬 저자는 ‘금척리는 경주시에서 국도를 따라 광명과 모량을 지나 건천읍으로 향하는 지점에 있다. 도로변 양켠에 작은 산같은 고분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금척이란 말 그대로 황금으로 만든 자라는 뜻이다’라며 ‘신라 진평왕이 정사를 보다가 낮에 깜빡 졸고 있었는데 일곱 무지개가 금으로 된 황금 자 하나를 건네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왕이 졸음에서 깨어나니 꿈속 신선에게서 받은 황금자(금척)가 바로 눈앞에 놓여져있는 것이었다. 금척은 죽은 사람도 그 자를 대면 다시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소원을 빌면 무엇이든 소원이 이뤄진다는 자였다. 나라의 부귀영화도 그 자를 가진 사람에게만 한한다고 하는 보물이었다. 그 덕택인지 신라의 제16대 진평왕에 이르러 신라는 날로 국력이 부강해지고 번창해갔다. 이러한 사실을 전해들은 당나라 황제가 당시 신라 진평왕에게 신하를 보내 금척을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이것을 자기의 손에 넣고 싶어서였다. 가져다 바치지 않으면 당장 많은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쳐부수겠다고 협박을 하고이 소식을 들은 진평왕은 계책을 세운다. 이에 진평왕은 금척리에 백성들을 동원해 여기저기 크고 작은 여러 개의 가짜왕릉과 같은 고분을 만들게 했다. 큰 무덤 여러 기를 조성하고 그 가운데 금척을 아무도 모르게 숨겼다. 왕은 이 고분 속 어느 속에 당신만 알고 혼자 이 금자를 묻어 두었다. 이 일로 인해 당나라 사신들과는 줄다리기를 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진평왕은 급병으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결국 황금의 자를 묻은 고분은 진평왕밖에 모르는 만고의 비밀이 되고 말았다. 진평왕이 사망하고 금척이 묻힌 곳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됐다’고 적고 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 발굴단, 황금자가 탐이 나 발굴 작업에 착수했으나 대홍수로 하는 수 없이 철수 ‘또, 일제 강점기의 이야기다. 고증을 받은 역사학자들이 황금자가 탐이 나 발굴 작업에 착수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우왕탕탕 하며 뇌선 번개가 치더니 비가 쏟아졌다. 하늘이 노한 것이다. 사방에서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들고 밤낮 일주일간 빗줄기가 끊일 줄 모르게 내려 퍼붓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일대는 대홍수가 났다. 일본인 발굴단은 하는 수 없이 철수 하는 길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뒤로는 누구도 이 금척 고분에 대해 손을 대지 못했다고 한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그래서 이 근방의 동네 이름을 금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고도 기록했다. 이곳 금척리 한 주민은 “주민들끼리는 표주박형 큰 무덤을 ‘대릉’이라 부른다. 여러 무덤 중에 금자가 묻혀있는 곳은 ‘대릉’이라는 설이 동네에 전해 내려온다. 80년대 중반경에는 사유권을 내세운 주민들이 건물 11채를 짓고 포도밭을 일구며 농사를 지으면서 고분군을 침식해 원형을 흐트려놓은 적도 있었다. 일부 고분은 고분 밑부분이 과수원에 잠식당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또 예전에는 고분군 사이사이에 민간인 묘도 있었다고 한다. 명당이라고 인식해 민간인 묘도 많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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