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 이말량(1908~2001) 선생은 1908년 경주 교동에서 태어나, 함흥 권번 출신의 기녀로서 일제시대와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등을 두루 겪은 근.현대를 살다 간 예인이다.
1947년부터 1996년까지 50년 동안 경주에서 살았던 예인이었으나 지금까지도 음악학계는 물론 경주 시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2001년 타계하기까지 경주 국악계의 많은 후학을 양성하고 지역의 각계에 자신의 전 재산을 기증기부하고 근현대를 살다간 출중한 예인이었음에도 제대로 조명되지 않은 것.
이말량은 한국 음악계에서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주로 함흥과 경주 등 지방에서 활동했으며 자신을 위한 연주회는 1984년 서라벌문화회관에서의 은퇴기념공연이 유일한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경주문화원 부원장이자 한국음악사학회 이사인 김성혜 박사가 2012년 발표한 논문 ‘이말량의 가무악 계보 연구’에서 발췌하고 김성혜 박사와의 인터뷰로 구성했다. 김 박사는 이 논문에서 이말량이 연주한 음악이 누구를 통해 계승된 음악인지, 이말량의 실력이 당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 조명하고 이말량 음악의 계통을 밝히고자 했다.
이말량 선생의 사진 제공은 제자인 이지영 교수(현 서울대 국악과 교수)에게 제공받았다. 이말량 선생을 이하 ‘이말량’으로 표기한다. 관련한 다른 이들도 존칭을 생략했다.
-이말량을 발탁한 인물은 ‘조금화’...함흥까지 동행해 조기교육 돕고 권번에 입학 시켜
1917년 이말량은 10살 때 풍물패 노는 것을 보고 3일 동안 쫓아다녔다. 그때 풍물패 중 ‘조금화’라는 이가 이말량을 눈여겨보고는 수소문 끝에 그의 집을 찾아갔다고 한다. 집안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말량은 ‘밤낮으로 울어’, 조금화를 따라 서울로 갔다가 다시 함흥 반룡권번으로 가서 혹독한 전통 가무악 교육을 받고 수련기를 거쳐 20~30대까지 거기서 활동한다.
조금화(1888~1921)는 이말량과 같은 고향 경주 사람으로 20년 연상의 무용에 능한 여성이었다. 조금화는 이말량이 예인이 되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 첫 스승이었다. 조금화는 대한제국시대의 경주 예인이었던 것이다.
이를 인연으로 조금화는 이말량을 양녀로 삼았고, 그를 훌륭한 예술가로 키우기 위해 함흥으로 데려가 그곳 권번에 입학시켰다. 이렇듯 조금화는 이말량을 발탁한 인물이고 함흥까지 동행해 이말량의 보호자겸 조기교육을 도왔던 이다.
이말량의 대부분의 가무악 습득은 1917년부터 26년까지 함흥의 반룡권번에서 이뤄졌다. 가무악을 습득한 이후 20년간 함흥에서 활동하고 생활했기 때문에 이 부분을 간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말량은 함흥에서 계속 활동 하다가 1925년 18살에 정남희에게 가야금산조를 배웠고 함흥 반룡 권번을 졸업한 1926년, 19살에 변호사 한창달과 결혼(후처)했다.
-40세에 고향 경주로 돌아와 1984년 은퇴기념공연 하기까지 줄곧 경주에서 활동
남편 한창달이 죽자 1947년, 당시 40세에 다시 고향 경주로 돌아와 1984년 서라벌 문화회관 은퇴기념공연을 하기까지 줄곧 경주에서 활동한다.
김성혜 박사는 “이말량은 당시 국악인들과 어울리고 1955년 당시 경주 읍장 최성규라는 이와 어울리면서 그의 후처로 다시 인연을 맺고 산다. 그러면서 동도국악원에서 같이 활동하면서 국악 활동을 계속해 나간다. 1959년, 어린 제자들을 양성하고 싶었던 이말량은 계림고전무용학원을 개원했다”고 했다. “1962년 신라문화제가 개막되었지만 예총경주지부가 없어 예총경북지부에 지원된 경비로 이 문화제를 치르게 된다. 그래서 당시 일성 조인좌 선생의 제안으로 예총경주지부가 발족돼 1964년부터 경주 사람들이 중심이 돼 신라문화제를 치른다. 이를 지속하려면 국악인들이 중심이 돼야 했고 이말량 학원의 제자들이 초반기 많이 참여했다”고 했다.
이말량은 이외에도 많은 후학들을 양성, 배출했지만 자신의 개인적인 공연 활동은 거의 하지 않는다.
-이말량... 함흥에서 익힌 아악부 계통의 경제와 경주에서 익힌 경주 향제 모두 보유해
김 박사의 연구 결과, 이말량은 함흥에서 여섯명(조금화, 박경원, 정용운, 정남희, 산성준, 김계선)에게 지도를 받았고 경주에서는 한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다. 이같이 함흥에서 여섯명에게 풍류와 산조, 병창, 춤 등을 사사받은 이말량의 실력은 3년 연상의 이소향과 대등할 정도였다.
권번 시험에서 동점으로 공동 1위를 한다. 이 당시 공동 1위로는 이소향이었는데 세 살이 더 많았던 이소향에게 1위를 준다. 이소향은 집안 내력으로 어려서부터 조기 교육을 받았지만 이말량은 뒤늦게 배워 이소향과 대등했다는 것은 타고난 재능과 뼈를 깎는 수련의 결과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편, 이말량은 양금풍류 전바탕은 아악부 출신의 박경원에게 배웠고 가야금 풍류 전바탕은 가야금의 명인 정용운에게 배웠다. 그 중 거문고 풍류와 단소 풍류를 경주에서 최창로에게 배웠는데 이것은 경주 향제일 가능성이 크다. 최창로(1880~1966)는 경주 사람으로 대금, 거문고, 피리를 잘했다. 최창로는 일제강점기부터 경주 율방에서 최윤과 함께 활동했고 1950년 후반, 동도 국악원의 사범을 했으며 1966년 작고할때까지 오직 경주에서 활동한 예인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풍류 음악에 있어 이말량은 함흥에서 익힌 아악부 계통의 경제와 경주 풍류의 사범에게 익힌 경주 향제를 모두 보유했다고 볼 수 있다.
가야금 산조는 정용운과 정남희에게 배웠는데 정용운제는 이미 1980년대에 가락을 잊었다고 하므로 이말량의 가야금 산조는 정남희제일 가능성이 크다. 이말량은 조금화가 지도한 내용을 뚜렷하게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승무, 검무, 화관무 등에 능했기 때문에 이를 포함한 춤의 기본기를 전승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로써 가야금 병창과 가야금 산조의 경우 대체로 계보가 선명하지만 풍류의 계보는 함흥에서도 배웠고 경주에서도 배웠기 때문에 선명하지 않다. 이는 앞으로 음원을 중심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한다. 춤 분야의 경우, 검무는 아악부 출신의 사범이었던 박경원에게 배웠다. 승무는 김계선과 한성준에게 배웠는데 김계선이 한성준의 제자였으므로 이말량의 승무는 한성준, 김계선, 이말량이라는 계보가 형성된다.
-가야금풍류와 병창, 산조, 민요, 시조, 춤 반주 음악 등의 64개 녹음 테입 남겨 악보와 음반으로
2001년 타계하면서 이말량은 가야금풍류와 병창, 산조, 민요, 시조, 춤 반주 음악 등에 능해 64개의 녹음 테입을 제자 이지영에게 남겼고 이지영은 이를 국립부산국악원에 제공해 악보와 함께 음반을 남겼다. 이것이 바로 ‘이말량 전(傳) 영남 줄풍류’다. 김성혜 박사는 이를 ‘경주’라는 지역명을 따 ‘경주 줄풍류’라고 해야 한다며 당위성을 주장했다. 2010년 9월 국립부산국악원에서 영남공연예술자료 제1집에 낸 것이 이말량 선생의 것이었다.
음악학계에서 이말량을 처음 주목한 이는 이보형(현재 한국고음반연구회 회장)이었다. 당시 이보형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에 재직했다. 이보형은 1984~1990년까지 네 번에 걸쳐 이말량과 면담하고 조사보고서를 냈다.
이보형은 1984년 5월 이말량의 은퇴공연 때 염불과 타령을 가야금으로 연주한 음원을 1999년 복원해 ‘향제 줄풍류’라는 제목으로 출시했다. 이보형 선생은 선생의 생존시 직접 인터뷰를 했던 이로 문화재보고서에 기록을 남긴 이인 것이다. 그도 ‘경주 풍류’라는 표현을 썼으므로 ‘경주 줄풍류’에 더욱 무게가 실린다.
-이말량의 제자들...국악계에서 선생 이어 ‘맹활약’
이말량의 제자 이지영(현 서울대 국악과 교수)은 다섯살 때 이말량의 제자로 입문해 가르침을 받고 서울로 가서 수학하다가 중고등학 방학때면 다시 경주로 내려와 선생에게 수학하기를 반복한 이다.
대표적인 수제자로서 스승 이말량의 10주기를 추모해 2011년 12월 스승에게 배운 가무악(歌舞樂, 가야금 연주와 병창, 승무)을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펼쳤다. 이 때 이지영은 가야금산조를 연주하면서 스승 이말량이 유품으로 남긴 가야금으로 연주했다.
이외에도 제자 이명실은 12살 때부터 1968년 고교 졸업까지 노래와 춤, 악기를 두루 익힌 뒤 무용전공으로 대학을 진학한 초기 제자다. 또 최은경은 이지영과 동기로서 함께 수학했으며 경북도 무형문화재 제19호 가야금 병창 이수자이며 동국대 한국 음악과 윤소희 교수도 이말량의 수제자로 국악계에서 선생을 이어 맹활약하고 있다.
-“이말량 선생은 자랑스러운 경주의 대표 국악인, 경주 문화 발전 위해 자신의 전 재산 선뜻 내놓은 것 선양해야"
김 박사는 “선생은 학원을 모두 정리하고 악기들과 무용 의상 등 여러 교구들을 일차적으로 경주여고에 기증한다. 또 1986년 학원을 정리한 오천만원을 경주고등학교에 장학금으로 기부한다. 이 장학금은 지금도 경주고 장학기금으로 존속하고 있다. 그리고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선생은 동국대 불교미술학과에 오천만원의 장학금을 기부하고 동국대 총장에게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악기를 기증했다. 이렇듯, 사회 여러 분야에 걸쳐 기부와 기증을 한 사표였다”고 했다.
또 “이말량 선생은 자랑스러운 경주의 대표 국악인이다. 후학들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선뜻 내놓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주의 기부문화에서도 선구자였고 근대 마지막 기녀세대로서 선생의 의식있는 안목에 주목해야 한다. 가무악에 능통하고 기량이 출중했던 오늘날의 예인이었다”면서 “기증이나 기부를 하지 않은 예인들도 많았다. 선생이 경주 문화 발전을 위해 기증하고 기부한 것을 오늘날 지역민들이 선양하고 그 정신을 후학들이 본받기를 바라며 선생을 추모하는 의식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