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은 일성 조인좌 선생의 삶을 재조명하고 그 뜻을 기리고자 일성(一城) 조인좌(趙仁佐,1902~1988) 선생 학술대회를 지난 20일 서라벌문화화관에서 개최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경주시가 주최하고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이 주관, 경주문화원, 예총경주지부, 광복회가 후원했다. ‘일성 조인좌 선생의 삶과 사상 ’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선생의 독립운동, 자선사업, 불교, 예술 등에 걸친 선생의 활동분야를 전반적으로 살펴보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이었다.
주요 발표의 논지를 정리해보았다.
▶기조강연(경상북도문화재 전문위원 조철제 선생)/일성의 삶과 사상
선생의 삶과 사상은 환경과 세태에 따라 여러 번 바꿨다. 선생의 사상적 배경은 유불에 바탕을 두고 있다. 어렸을 때 선생은 전통적 유가 집안에서 유학을 익히며 학문을 닦았다. 마침내 참혹한 일제강점기 때 고문으로 맏형의 죽음을 맞은 이후 한가롭게 시문을 읊고 이학(理學)에 잠심할 처지가 아니었다.
실현을 도피하기 위해 산사를 찾아 고승과 대담하며 불경에 빠져들며 항일을 지속하였다. 광복 후에 각종 불교 사업과 불교 학생회를 뒷바라지 하며 재가 불자로서 소임을 다하였다. 또 대자원 설립 이후 대덕당한약방(大德堂漢藥房)을 부용당한약방(芙蓉堂漢藥房)으로 개칭한 것은 선생의 유불 사유체제가 전환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선생은 유가의 사상과 예를 중시하고 그 본질을 매우 중시하였다. 요컨대 선생은 내유외불(內儒外佛)의 실천사상가로서 위상과 역할을 충실했다고 말할 수 있다.
▶발표(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강윤정 학예연구부장)/일성(一城) 조경규(趙慶奎)의 독립운동
조경규(조인좌 선생의 다른 이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찾아, 그 길을 꿋꿋하게 실천해 나갔다. 세 차례의 체포와 구금을 겪으면서 모진 고문으로 육신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그는 그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유년시절 일제강점을 둘러싼 어른들의 걱정은 곧 청년 조경규의 삶에 큰 이정표가 되었다. 그는 1926년 광복단에 입단할 때까지 ‘우국제민’과 ‘우국충정’을 가슴에 담고 ‘혼정심성(昏定晨省)’의 태도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이는 실천으로 나아가는 강한 추동력이 되었다. 그 길에 자신이 닦은 유학적 심성은 큰 자양분이 되었다. 여기에다 유년시절 어머니를 따라 사찰을 드나들며 친연성을 느꼈던 불교는 1920년대 중반이후 인생 노정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자금모집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일제강점하에 독립운동 자금모집 활동은 공식적·객관적 자료로 드러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조경규가 선택한 방법은 삶과 생활이 자금 모집활동과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의협적 방법보다는 평화적인 방법을 견지하였고 그 방법이 여의치 않자 스스로 마련한 소득을 자금으로 제공하였다. 이는 그의 자금모집 활동이 잘 드러나지 않아 공식 자료에 등장하지 않는 한계점으로 지적될 수 있는 측면도 있지만, 오랜 세월동안 자금모집을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발표(김성혜 신라문화연구원 학술팀장)/조인좌의 국악 활동과 인재 양성
‘부용당 할배’로 알려진 조인좌 선생은 경주에 거주하면서 독립운동과 자선사업 및 교육활동과 불교활동 그리고 예총활동과 국악 활동 등을 펼치면서 일생을 지역발전에 헌신한 인물이었다. 설명했다. 이 발표는 그의 활동 가운데 ‘국악 활동’을 조명하여 그가 경주사회에 끼친 영향과 그 의의를 찾고자 시도한 것이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겪은 직후 천년 고도 경주 역시 전통음악이 단절되는 위기에 처했을 때 조인좌 선생은 당시 지인들과 함께 국악만이라도 명맥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1955년 동도국악학원 설립에 동참하였는데 1956년 동도국악원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동도국악원은 시민들의 몰이해와 재정상의 어려움으로 운영에 위기를 맞았으나 1966년 8월 시립국악원이 출범하게 되었다. 이때 출범한 시립국악원은 동도국악원과 기존에 경주시가 접객업체 종업원들의 국악교육을 위한 ‘관광요원교육원’과의 통합이었다.
경주시립국악원은 국립국악원의 최초 분원이 되었으며, 시립국악중학교였다. 이곳에서 차세대 인재들이 양성되고 있었다. 여기서 양성된 졸업생들은 국내외로 진출하여 활동하게 되었는데 졸업생을 배출한 지 40여 년이 지난 오늘날 당시 강사들은 경주를 대표하는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지정되는 성과를 올렸다. 동도국악원 10년, 경주시립국악원 10년 약 20여 년 동안 전통음악을 계승하여 씨앗을 상당히 뿌렸으나 그 후 폐원된 것이 안타깝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선생의 이러한 업적을 드러내고 기림으로써 후대인들이 그의 빛나는 삶을 본받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폐원된 경주시립국악원도 부활되어 전통문화의 맥을 이어가기를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