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을 곧게 세우고 / 두 손바닥을 모아 /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지신 / 관음보살님 앞에 비옵니다. / 천의 손과 천의 눈 가운데 / 하나를 내어 주시면 하나가 덜어지지만 / 둘도 많은 저희인지라 / 하나만이라도 살며시 내어 주신다면 / 아아 / 제 진실한 마음을 알아주신다면 / 이 몸을 불러 쓰실 때에는 / 자비의 뿌리가 되어 드리오리다.
『삼국유사』권3 분황사천수대비맹아득안조(芬皇寺千手大悲盲兒得眼條)에 나오는 향가이다. 신라 경덕왕 때, 경주 한기리(漢岐里)의 여인 희명의 아들이 생후 다섯 해 만에 갑자기 눈이 멀게 되자, 희명이 분황사의 좌전(左殿)에 있는 천수대비의 벽화 앞에서 아이로 하여금 이 노래를 부르게 하고 기도하여 마침내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분황사는 신라시대에 눈 먼 맹아를 눈뜨게 해 주는 영험있는 절로 이름이 난 것을 알 수 있다.
지난 5월 부처님 오신날을 앞두고 분황사의 주차장 입구에는 커다란 돌비석(분황사사적비)이 하나 들어섰다. 얼핏 보아도 중국산 대리석 느낌의 빗돌에 모양마저 그 쪽을 빼어 닮았다. 높이 4.5m × 폭 4.5m × 두께 1.9m인 이 안내 표지석은 처음에 고구려 광개토대왕비(6.17m) 크기로 세우려다가 허가기관의 반대에 부딪혔다니 그 발상에 놀라울 뿐이다. 아마도 지금의 분황사는 신라 8세기에 벽화 하나로 눈을 뜨이게 하던 영험이 사라져서 눈 밝은 이마저 행여 놓치고 지나칠까봐 자비심을 베푼 모양이다.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상식 밖의 일이라 분통이 일어나는 것은 아직 부처님 가르침의 언저리에만 맴도는 때문일까? 주변 경관에도 전혀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어떻게 저 자리에 저 모양으로 세울 수 있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분황사 주차장 부지는 이미 발굴을 통해서 회랑과 건물지가 있었음이 확인 되었다. 그곳에 험상궂은 비석을 세울 수 있었던 데는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의 허락과 경주시의 승낙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불국사의 말사인 분황사는 현재의 담장 안쪽의 토지만 소유하고 있다. 담장 밖의 비석 자리와 주차장은 경주시의 소유이다. 안타깝게도 분황사는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지 않아 탑과 우물 등의 개별 지정문화재만 법의 관리 아래에 있는 것이다. 사적으로 지정되면 그 구역 안의 나무심기나 도랑파기, 시설물설치 등은 하나하나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의 심의를 거쳐 이루어진다.
이번 비석의 승인은 사적이 아니기에 문화재위원회 건조물분과에서 허락하였다하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현실인가. 경주시도 토지 소유주이기에 토지 사용승낙을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찌 남의 땅에 마음대로 구조물을 세울 수 있겠는가. 어느 누군가가 자기 시설물을 알리고자 경주시 소유의 땅을 비석자리로 빌려 달라고 한다면 과연 순순히 빌려 주겠는가. 앞으로 이 땅을 무상으로 빌려 주었는지, 그나마 임대비용이라도 받았는지 살펴볼 일이다.
공자의 말씀에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이 있다. 지나치면 부족한 것보다 못하다는 이 말이 분황사 안내 표지석을 두고 하는 말이라 생각된다. 원효성사를 기리는 비석 받침이 경내 석탑 옆에 초라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데 이보다 몇 곱절 크게 만들고 싶었던 중[僧]님들의 욕심이 너무 과했다는 생각이다.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길목의 북쪽을 보고 세운 안내 표지석은 앞면 상단 대리석에 ‘원효성지 (유네스코) 국보 제30호 분황사’라 쓰고 있다. 아무리 보아도 분황사가 국보 제30호란 뜻으로 밖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또 국보 제30호 글자 위에 유네스코 표장을 새겨 놓아 자칫 국보 제30호(분황사모전석탑)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오른 쪽 옆면을 보면 이 비석을 세운 사람으로 보이는 인명을 새겼는데 더욱 가관이다. 본인들이 물심을 보탰는지, 또는 이름이라도 쓰도록 허락 하였는지, 아니면 세우는 쪽에서 무단으로 써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통령과 문화재청장, 경상북도지사, 경주시장 이름을 또렷이 새겨 놓았다. 왼편부터 세로쓰기로 쓴 관가의 인명은 의전순서도 틀렸으며, 중(僧)님들의 법명은 반대로 오른편에서부터 순서를 잡고 있다.
동쪽면에는 ‘아아!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빛나는 인류의 스승 원효성사이시여! 월정교의 교교한 달무리에 봄 밤이 깊어 가는데 소 양뿔위에 화엄 설하시고 오늘도 내일도 금강삼매 드시네. 아아 설총의 효심에 천진한 성스러운 옆모습을 왕래인 인파속에 몇이나 알고 가는가! 오늘 우리는 큰 바위로 기치를 세우고 새벽을 여는 성사의 자비광명이 다시 우주에 비추어 주기를 소망하고 축원하며 이 비석을 세웁니다’ 이로 보아 절에서는 ‘분황사사적비’라 이름 붙였으나 절의 내력이나 있었던 일들을 기록한 사적비가 아니라 분황사 안내 간판이자 원효성사를 송덕하고 축원한 비에 그치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화재청으로부터 건립허가를 받을 때 비석의 명칭을 무엇이라 하여 통과했는지도 갑자기 궁금해진다. 조계종단에는 서예로 유명한 고명하신 스님들이 많이 있는데도 글씨체는 컴퓨터에서 뽑은 활자체를 쓰고 있다. 아마도 급하게 세우려다 보니 그랬을지도....
분황사는 선덕 여왕 3년(534)에 창건된 절로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제30호)과 분황사화쟁국사비부(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분황사석정(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 경주구황동당간지주(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 분황사약사여래입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19호), 석등, 건물, 건물지의 초석 등의 문화유산이 있다. 이번에 표지석 세울 때 쓰인 비용을 분황사 당간지주 주변을 정비하는데 썼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물밀듯 밀려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