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을 했다. 먹다(eat)는 단어를 본 직후 so_p라는 단어를 채워 넣으라면 비누(soap)보다 수프(soup)라고 할 확률이 훨씬 높다. 반면에, 씻다(wash)라는 단어를 먼저 본 후에는 so_p라는 단어를 비누로 채울 가능성은 더 커지고. ‘먹다’는 ‘스프’에 대한 생각을, ‘씻다’는 ‘비누’에 대한 생각을 점화시킨다고 하여 소위 점화효과(priming effect)라고 한다. 이 효과는 실로 다양한 형태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다. 의식을 하건 안하건 간에 ‘먹다’는 단어가 머리 안에 있다면 누군가 작은 소리로 음식 이야기를 해도 잘 들리고, 메뉴판에 글자가 작거나 흐릿한 글자로 쓰여 있다 해도 더 잘 눈에 띈다고 한다. 이미 머릿속에 점화된 생각은 다른 생각을 계속 점화하니까 그렇다. 또 실험을 했다. ‘늙었다(old)’는 단어를 보고 난 후 노년과 관련된 ‘천천히 걷는 행동’이 점화된다. 이 또한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실험이 끝난 후 일어나 물을 마실 때도 평소와 달리 마치 노인들처럼 물을 천천히 마시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반대로 ‘젊다(young)’는 단어를 본 노인은 여느 때보다 더 걸음걸이가 활기차고 물도 마치 젊은이들이 마시는 것처럼 활기차게 단숨에 마셨다는 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이 점화효과는 단순하고 평범한 제스처로도 드러난다. 헤드폰 장비의 품질 점검이 목적이라는 실험에서 피험자 중 절반에게는 아래위로 고개를, 나머지 절반은 좌우로 고개를 흔들면서 작업을 하라고 지시받는다. 그들이 헤드폰을 쓰고 들은 것은 사설이다. 머리를 아래위로 끄덕인 사람들은 그들이 들은 사설 내용을 수용하는 경향을 보인 반면, 좌우로 흔든 사람들은 그 내용을 거부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한다. 그저 고개를 아래위나 좌우로 흔들거렸을 뿐인데 이것이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행동으로 자연스레 점화된 것이다. 이 점화효과는 인간의 의식에 아주 교묘히 영향을 미친다. 가령 피실험자들에게 전화나 이메일로 가상의 인물에게 거짓말을 하게끔 유도하였다. 이후 제품 구매도를 살펴보니 전화로 거짓말을 했던 사람은 비누보다 구강청결제를, 이메일로 거짓말을 보낸 사람들은 구강청결제보다 비누를 선호했다는 재미있는 실험도 있다. 동궁과 월지를 지나서 경주 국립박물관 뒷길로 조금만 가다가 보면 필자가 잘 가는 무인 찻집이 하나 있다. 당연히 주인도 없고 서빙해 주시는 사람도 없다. 깨끗이 씻겨서 손님을 기다리는 다구들이 방방마다 준비되어 있을 뿐이다. 역시나 구미에 맞게 다양하게 구비된 차를 마음껏 마시고 두당 얼마씩 내고 가면 된다. 학생들을 데리고 자주 이 찻집을 이용하면서도 이렇게 해서 장사가 될까? 차만 마시고 돈을 안 내는 얌체 손님들은 없을까? 그 흔한 CCTV라도 달아놓지 그랬나? 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절대 그럴 일은 없지만 혹시나 해서 뱀다리를 그려본다면 이렇다. 차를 마시고 돈을 낼 의사가 전혀 없는 고객은 일단 논외로 둔다. 정상적(?)인 고객이 될 수 있는, 그러나 지금은 다른 마음을 먹고 있는 고객 눈이 가닿을 수 있는 위치에다가 커다란 눈을 그려놓기만 하면 알아서 돈을 무인함에다가 집어넣게 된다. 이 또한 점화효과로 설명할 수 있다. 또 실험(이게 마지막이다)을 했다. 영국의 한 대학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차나 커피를 마실 때마다 ‘정직 상자(honest box)’에 돈을 집어넣게 했다. 주방 벽에는 항목별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어느 날 그 가격표 바로 위에 포스터가 하나 붙었는데, 직원들을 응시하는 눈 아니면 꽃 이미지였다. 10주 동안 관찰 해본 결과 웃기게도 직원들을 응시하는 눈 포스터가 걸린 날은 꽃 포스터가 걸린 날보다 3배 가까이 더 많은 돈이 정직 상자 속에 들어 있었다나. 무인 찻집 주인은 절대로 커다란 눈을 그려두지 않을 것 같아 해본, 실없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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