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18년(935) 12월에 신라 경순왕이 항복해 오자 그 국도(國都)를 ‘경주(慶州)’라 칭하고 경순왕의 식읍으로 주었다. 그리고 위영을 경주 주장으로 삼아 다스렸다(-동경잡기 명환)’. ‘경주’는 지금부터 천여 전 935년 12월 탄생했다. 신라의 멸망과 함께 왕경은 그 지위를 내려놓고 고려의 지역 도시 ‘경주’로서 새롭게 출범하게 된다. 지역에 남은 토착사회의 백성들과 지역의 지도자들은 변화된 환경 속에서 지역사회를 지켜나가며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역사 문화 도시 ‘경주’라는 명칭은 천여 년 전 그렇게 시작되었다. 고려시대 경주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으며 역사상 유명한 이들 가운데는 경주 출신이 적지 않다. 삼국사기 편찬자로 널리 알려진 김부식은 고려 전기를 대표하는 경주 출신 문인이다. 이의민은 고려 후기 무인 시대의 대표적인 경주 출신 무인이다. 강인한 체력을 바탕으로 바닥에서 시작해 무신 정권에서 최고의 지위까지 올랐다. 또 고려 후기의 국제인으로 문인, 정치가, 외교가였던 이제현도 본관이 경주였다. 이번호에서는 고려시대 문인들의 새로 발굴한 시와 글을 통해 당시 ‘고려시대 경주인’들의 풍류 혹은 당시의 사회상을 들여다보았다. 이 기사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 ‘고려시대의 경주’ 에 대한 상세한 기록과 해설을 묶어 발행한 ‘고려시대의 경주’에서 부분을 인용발췌하고 국립경주박물관 이용현 학예사의 자문을 바탕으로 구성했음을 밝힌다. 이용현 학예사는 “유물 자료로 고려시대 경주를 구현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볼 수 있는 것으로 문헌 자료 즉, 글자 자료로 고려시대 시대적 분위기를 좀 더 알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고려시대 경주 사람들...고난과 격동 이겨내며 지역사회 경주를 꾸려나간 수많은 이들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동경잡기’ 등 여러 문헌 기록속에는 경주에서 살아 간 사람들의 여러 모습을 보여준다. 관찰사나 부윤같이 중앙에서 파견된 이들이 있었는데 최영, 정몽주도 관리로서 경주를 거쳐갔다. 선대에 고향을 떠났지만 고향 경주를 방문하거나 관심을 가진 이들도 있었으니, 최승로의 손자인 최제안이나 경주를 시로 읊은 김극기 같은 이들이 그들이다. 왕조의 교체, 정변, 외침, 지진 같은 천재지변 등 고난과 격동을 이겨내면서 생활의 현장을 지키며 지역사회 경주를 꾸려나간 이름을 남기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경주 사회에 충성을 독려하는 중앙정부의 강력한 메시지...손시양의 효행정려비 이규보(1168~1241, 고려 후기 문신)는 전주의 속관으로 지낼때 ‘고을살이 즐겁다 마오’ 라는 시에서 고을 원님의 업무를 잘 그리고 있다. ‘동경 유수(고려 시대에, 오늘날의 경주인 동경을 다스리던 벼슬. 삼품 이상의 벼슬아치를 임명)’의 업무와 고민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고을살이 즐겁다 마오 고을살이 도리어 걱정 뿐일세/ 관아의 뜰은 시끄럽기가 시장 같고/ 송사 문서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네/ 가난한 마을에도 세금을 부과하고/ 감옥에 갇힌 죄수들이 안타깝네/ 중략//.’ 고려시대 1182년(명종 12) 손시양의 효행정려비가 지금의 황남동에 세워졌다. ‘마을에 과거 웅시자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손시양이다. 그의 아버지 윤백이 단정하게 최후를 마치니, 묘에 움막을 짓고 3년간 지켰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금산 중곡에 묻었는데 이전처럼 묘를 지켰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부모 섬기는 도리를 다하였다고 해서 고을에서 이러한 상황을 상세히 유수에게 보고하였고 유수는 임금님께 아뢰었다. 임금님 그 효행을 가상히 여겨 비석을 세워 표창하고...’ -때는 대정 22년 임인년 12월. 동경 유수 채정 기록함. 이러한 조치는 정권이 경주 사회에 던지는 뚜렷한 의사 표현이었을 것이다. 부모에 대한 효행이 국왕에 대한 충성과 직결된다. 경주 사회에 충성을 독려하는 중앙정부의 강력한 메시지였다. -김극기...12세기 말 무렵 황룡사, 분황사의 모습 시에 담아 당시 경관 짐작 할 수 있어 김극기(1150무렵~1209)는 고려 명종 문인으로 경주 사람이다. 12세기 말 무렵 황룡사의 모습을 시에 담고 있어 당시 경관을 짐작 할 수 있다. ‘제후도 탐낼만한 집/ 여름에도 덥지 않아/ 내 섭정능을 따라/ 청허부에 날아 들어가/ 몸은 푸른 옥 두꺼비를 타고 손은 흰 옥 토끼를 만져보고 싶었지만./ 애석하다, 비린 범부는/ 구름 속 하늘로 돌아 갈 길 잃었다/ 중략// 달팽이는 푸른 섬돌가에 침흘리고/ 새는 높이 솟은 나무 위에서 지저귄다./ 전각은 장엄하고 화려함을 자랑하며/ 허공을 향해 높이 날아갈 듯하다./ 중략// 지는 해 바라보며 평림을 찾아가니/ 긴 회랑에는 법고 소리 울린다.// ’ 이 시는 고려시대 황룡사의 모습을 짐작 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사찰을 묘사하고 있으면서도 불교나 부처 신앙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김극기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초야에서 시를 짓다가 40대에 명종의 부름을 받고 벼슬길에 올랐다. 그의 글은 고려말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문집은 망실됐다. 그러나 작품의 일부가 ‘동문선’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한다. 경주와 관련해서는 분황사, 월정교 등의 여러 작품을 남겼다. 김극기는 또, ‘분황사’에서 ‘섬돌에 이끼 덮이고 댓잎이 처마를 쓰는데/ 스님과 담소 속에 어두운 눈이 밝아오고/ 연못가에서 항상 혜원을 생각하고/ 수란 기울이며 오만하게 돌아가는 걸 잊으니/ 워낙 경내가 맑으니 한 더위도 모른다오/ 취객들 높은 덕담에 붉은 수염 드날린다/ 문전 버들에서 또 도잠이 그립구나/ 쓸쓸한 석양이 주렴 절반이나 내려왔네//’ 이 시로 사찰 안에 연못이 있었으며 버들이 심어져 있었고 경내에서 술을 하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기림사’, ‘천관사’, ‘천룡사’에 관한 시와 글 전해져 신돈의 전횡을 비판하다가 파직된 고려말의 관리 이달충(1309~1384)의 ‘기림사’라는 시가 전한다. ‘기림사 부처님을 참배한 뒤/ 반월성 관사로 돌아왔네/ 산 깊으니 구름은 골짜기에 있고/ 늙은 나무에 풀이 가지에 돋았다// ’ 고려시대에도 ‘사천왕사’가 여전히 외적 침입을 막아 나라를 지키는 호국 도량으로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는 글도 전한다. ‘경자일. 문두루도량을 동경 사천왕사에서 27일 동안 열어, 오랑캐 군대의 침략을 막아 달라고 빌었다(-고려사 세가, 문종 28년).’ 또, 청렴하기로 소문난 고려 중기의 문신 이공승(1099~1183)이 ‘천관사’를 지나면서 남긴 시가 동문선에 전한다. 이 시에서 천관사가 12세기 고려시대에 개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천관이란 절 이름 옛 사연이 있는데/ 개축한다니 홀연 서글퍼진다/ 술 취한 공자님(김유신)은 꽃 아래 노닐었지만 한 서린 고운이(천관녀)는 말 앞에서 울었다네/ 말도 정 있어 길을 알았건만/ 종놈에게 무슨 일로 채찍질하였을까/ 묘한 노래 한 곡만 남아/ 달과 함께 만고 뒤에도 전하는구나// ’ ‘천룡사’는 내남면 용장리 남산의 남쪽에 있는 사찰이었다. 고려시대 이 절은 장관격인 시중 최제안이 고려의 번영과 왕실의 만수무강을 위해 다시 지어 일으켜 세운 절이다. ‘우리 천룡사에서도 절의 스님들 중에서 재주와 덕이 모두 높은 고승을 선발하여 우리 절의 동량으로서 주지를 삼아 오래 분향하고 도를 닦게 하고자 한다. 모두 문서화하여 담당자에게 보내라. 하략(-삼국유사 권3 탑상 제4 천룡사에 보이는 최제안의 신서)//’ -김부식의 박학다식함과 경주 출신 무신 이의민, 고려시대 경주의 관리들도 기록돼 고려를 방문했던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김부식의 박학다식함을 칭찬했다. ‘김부식은... 널리 배우고 기억력이 좋아 글을 잘 짓고 고금의 일을 잘 안다. 학사들에게 신뢰를 얻는 이로서 그보다 앞설 사람이 없다’ ‘고려사’ 이의민 열전에서는 ‘이의민은 경주 사람이다. 아버지 이선은 소금과 채를 팔아 생계를 이었으며, 어머니는 연일현 옥령사의 노비였다’고 했다. 이 밖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경주부조의 명환(유명한 관리) 고려 부분에서 명환 자료를 통해 고려시대 경주의 관리들을 알 수 있다. 정극영, 최 호, 채정, 엄수안, 권 단, 최성지, 윤선좌, 이무방, 이성공, 우인렬, 정세운, 유숙, 나익희, 안보, 조운흘, 조달생, 이세필 등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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