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종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 이 구절을 온몸으로 실천한 사람이 바로 이차돈이다. 국립경주박물관에 불교 공인을 위하여 순교한 이차돈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이차돈순교비가 있는데, 이차돈공양탑, 이차돈공양당 또는 백률사석당이라고도 한다. 법흥왕 14년(527)*에 순교한 이차돈을 추모하여 그가 순교한 지 290여 년이 지난 818년에 건립하였다. 사각기둥이나 자연석에 명문만 기록하는 일반적인 비의 형식과는 달리 육각기둥에 조각과 비문이 결합된 비상(碑像)의 일종이다. 원래 이곳 백률사에 있었으나, 1914년 백률사가 일시 폐허가 되자 이 비를 경주 시내의 고적보존회로 옮겼다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장하게 되었다. 이 비석은 원래 지붕 모양의 옥개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받침돌은 네모난 석재 윗면을 육각형으로 도드라지게 높이고 윗부분에 연꽃무늬를 새겼다. 육각형의 한 면에는 이차돈의 순교 장면이 조각되어 있는데, 땅이 진동하고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잘린 목에서 피가 솟아오르는 장면을 간결하면서도 극적으로 표현하였다. 나머지 다섯 면에는 바둑판처럼 가로 세로로 교차하는 7행 25칸을 만들고 그 안에 한 글자씩 해서체로 음각하였다. 비문은 심하게 마멸되어 읽기 어려우나 마멸되기 전에 이 석당기를 목판에 새긴 법첩(法帖) 2종이 전래하여 마멸된 부분을 보충하여 이해하게 되었다. 그 내용은 법흥왕이 백성들을 위하여 불법을 일으키려고 하자 이차돈이 고의로 잘못을 범한 것으로 꾸며 자신의 목을 치게 하여 순교한 일, 그의 목을 베자 목에서 흰 우유가 한 길이나 솟구치면서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땅이 흔들린 일,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장례를 치르고 사당을 세운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비문을 지은 사람과 글자를 새긴 사람은 모두 밝혀져 있지 않다. 현존하는 불교의 공인과 관련한 사료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며, 통일신라시대의 복식 및 조각사를 연구하는 데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차돈의 성을 이씨로 잘못 이해하곤 한다. 그러나 그의 성은 박씨이고 이름은 염촉(厭髑). 거차돈(居次頓)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 주(注)에 의하면 김용행이 지은 아도비문에 그의 아버지는 길승(吉升), 할아버지는 공한(功漢), 증조부는 제16대 흘해왕이다. 이차돈의 순교 이전에 이미 신라에는 불교가 들어와 있었다. 제19대 눌지왕 때 묵호자라는 승려가 고구려에서 일선군(현 선산) 모례의 집에 머문 적이 있고, 또 제21대 소지왕 때에는 아도라는 승려가 제자 3명과 함께 역시 모례의 집에 머물고 이 제자들이 경률을 강독하니 신봉자가 있었다고 한다. 또 이때 궁중에서 분향 수도하는 승려가 궁주(宮主)와 간통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차돈이 순교한 시기를 『삼국사기』에서는 528년으로 『삼국유사』에서는 527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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