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동 남산의 동북쪽 기슭의 탑곡이라 불리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 ‘옥룡암’. 이 절의 허름한 요사체에 독립투사요, 민족적 저항시인이었던 이육사 선생(1904~1944)이 한동안 머물며 요양했다고 한다.
선생이 경주에 머무른 흔적은 1942년 막역한 지기였던 시인 신석초에게 보낸 엽서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이육사 문학관 자료에 의하면 선생은 1936년과 1942년 경주 옥룡암을 찾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선생이 투옥됐다 나온 후 석달 간 머물렀다는 옥룡암의 요사채로 보이는 ‘삼소헌(三笑軒)’이라는 방이 지금도 그대로 있었다. 핍박받던 시절, 이육사 선생의 기개와 저항정신을 떠올리며 한동안 묵념을 올렸다. 단촐한 세 칸 짜리 기와를 인 이 요사채는 작고 아담했지만 허물어질 듯 오래된 절집으로 보였다.
육사 선생이 삼소헌에서 머무른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당시 법당도, 승방도 아닌 이곳 요사체가 적합했을 것이라고 한다. 삼소헌의 상태는 현재 누수가 진행되는 등 개보수가 절실해 보였다. 안타깝게도 이 시절 무슨 시를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유명한 ‘청포도’ 초고를 구상했던 시기라고 전한다.
육사 선생의 외동따님이신 이옥비 여사(현재 이육사 문학관에서 아버지 육사 선생에 대한 강의 하고 있음)는 전화 통화에서 “경주에서 요양했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손병희 교수가 쓴 글에서도 알 수 있지요. 어머니께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고문으로 몸이 쇠약해져 옥룡암이 조용하고 요양하기 좋아서 계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고 했다.
-이육사 선생은
본명은 원록(源綠). 1904년 안동 출생. 보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대구 교남학교에서 잠시 수학했다. 1925년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에 가입, 그 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의열단의 사명을 띠고 북경으로 갔다. 1926년 일시 귀국, 이듬해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좌, 3년형을 받고 투옥된다. 이 때 그의 수인(囚人) 번호가 264번이어서 호를 육사(陸史)로 택했다고 전한다.
1929년에 출옥, 이듬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곳 북경대학 사회학과에서 수학하면서 만주와 중국의 여러 곳을 전전, 정의부·군정부·의열단 등 여러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해 독립투쟁을 벌였으며, 1933년 귀국해 이 때부터 시작(詩作)에 전념, 육사란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한다.
1934년 신조선사 근무를 비롯해 조광사, 인문사 등 언론기관에 종사하면서 시 외에도 한시와 시조, 논문, 평론, 번역, 시나리오 등에도 재능을 나타냈다. 1937년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자오선』을 발간해 ‘청포도’, ‘파초’ 등의 상징적이면서도 서정이 풍부한 목가풍의 시를 발표했다. 시작활동 못지않게 독립투쟁에 헌신해 전 생애를 통해 17회나 투옥됐다.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광야’와 ‘절정’에서 드러나듯이 그의 시는 식민지하의 민족적 비운을 소재로 삼아 강렬한 저항 의지를 나타내고, 꺼지지 않는 민족정신을 장엄하게 노래한 것이 특징이다.
1941년 폐병을 앓아 성모병원에 입원, 잠시 요양했으나 독립운동을 위해 1943년 초봄 다시 북경으로 갔다. 그 해 4월 귀국했다가 6월에 피검되어 북경으로 압송돼 수감중 북경의 감옥에서 40세를 일기로 옥사했다.
-옥룡암(불무사, 신인사지)...‘신인사(神印寺)’라는 명문 새겨진 와편으로 ‘신인사지’로 추정
옥룡암(玉龍庵)은 경주 배반동 남산의 동북쪽 기슭의 탑곡이라 불리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 대한불교정토종 소속의 사찰이다. 오랫동안 옥룡암이라 부르다가 2000년대 중반 쯤 불무사(佛無寺)로 사명을 변경했는데 여전히 옥룡암이라 부르는 이들이 많다.
불무사는 1924년 박일정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 불무사는 신라시대인 7세기 경 명랑스님에 의해 창종된 신인종(神印宗)의 사찰이었던 신인사(神印寺)의 절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학자가 이 절터에서 신인사(神印寺)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조각을 발견한 바 있어 신인사지로 추정한다. 대웅전 왼편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올라가면 보물 제201호로 지정된 ‘경주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이 나온다.
-육사 선생의 경주 옥룡암에서의 자취...1936년(32세)과 1942년(38세)
1936년 32세때 경주 남산 옥룡암에서 휴양한다. 선생은 다시 1938년 가을에 신석초 최용, 이명룡 등과 경주 여행을 한다. 1939년 선생이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고 했던 ‘청포도’를 발표한다. 1942년 38세때 당시 폐질환으로 성모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했던 선생은 1943년 경주 현내면 기계리의 이영우와 서울의 이태성 집에서 번갈아가며 지냈다. 그해 7월, 다시 신인사지(옥룡암)에서 요양을 한다. 이때 금오산 어느 암자에 기거하고 있는 고암 박곤복을 방문한다. 고암집에 “나의 벗 육사군의 찾음”이란 구절이 있다.
또 먼저 와서 용양하고 있던 이식우에게 털어놓은 말이다. “내고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우리 민족인데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 민족이 익어간다. 그리고 곧 일본도 끝장난다”고 이식우에게 말했다고 한다.
-육사가 경주에서 시인 신석초에게 보낸 ‘옥룡암에서’ 최근 공개
시인 신석초가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최근 공개된 ‘옥룡암에서’ 라는 제목의 편지글에서는
초략// ‘석초형! 나는 지금 이 너르다는 천지에 진실로 나 하나만이 남아있는 외로운 넋인듯하다는 것도 형은 짐작하리라. 석초형, 내가 지금 있는 곳은 경주읍에서 불국사로 가는 도중의 십리 許에 있는 옛날 신라가 번성할 때 神印寺의 古趾에 있는 조그마한 암자이다. 마침 접동새가 울고가면 내 생활도 한층 화려해질 수도 있다. 중략//
석초형, 혹 여름에 피서라도 가서 服藥이라도 하려면 이곳을 오려무나. 생활비가 저렴하고 사람들이 순박한 것이 천년 전이나 같은 듯하다. 그리고 답하여라. 나는 3개월이나 이곳에 있겠고, 또 웬만하면 영영 이 산 밖을 나지 않고 僧이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곧 부럽고 편한 듯하다. 아무튼 경주 구경을 한 번 더하여 보려무나. 몇 번이나 시를 써 보려고 애를 썼으나 아직 머리 정리되지 않아 못하였다. 7월 10일’이라고 쓰여있다.
-‘이식우 선생이 돈과 생필품 전달하려 옥룡암에 들를때 ‘청포도’ 초고 앞에서 고심하던 육사 모습 봤다’
권오신 전 포항 MBC 보도국장이 쓴 ‘이육사와 경주 옥룡암’에서는
초략// ‘토함산 해맞이로 아침을 여는 경주 동남산의 작은 절집이 이육사와 짧은 인연을 가진 옥룡암이다. 이 절 허름한 요사체에 독립 투사요 민족적 저항시인이었던 육사가 한동안 머물며 시작 활동에 몰두했던 곳이다. 당시 곤궁했던 육사의 처지를 후원했던 분은 경주 교육의 선구자이신 이규인(수봉재단 설립자)이다. 수봉의 족질이 되시는 이식우(경주중학교 교장 역임)선생은 부친이 내린 돈과 생필품을 남몰래 전달하려 옥룡암에 들를때 청포도 초고를 앞에 두고 사고하는 육사의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이같은 사실은 5년전에 돌아가신 이상열 경주문화원장(수봉재단 설립자의 종손)의 생전 증언으로 전해진다.
일제의 눈초리를 피하기 쉬운 사찰인데다 불가의 고승들과의 친분관계로 절집을 찾은 것 같다. 육사는 경주에 오면 스스럼없이 이 절을 찾은 것으로 추측된다. 육사는 건천읍 화천리 출신 민족 지사이자 영남학파의 제일 문사였던 고암 박곤복과도 절친한 사이였다. 병마에 시달리던 친구 고암을 두고 경주를 뜨게 된 육사는 절명 시 같은 짧은 단편을 남겼으니 ‘임오 첫 가을/ 밤차로 벗을 멀리 보내고/ 외롭게 비오는 금오산 암자 한 옆방에서’라고 썼다. 금오산의 암자는 이 옥룡암일 것이다. 중략// 서울 성모병원에서 퇴원, 감시의 눈을 피해 경주 옥룡암에 다시 내려 온 육사의 방에는 신석초, 김범부 선생도 자주 드나든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써 진 것으로 알려진 수필 ‘산사’에서도 ‘천년 고찰이 즐비하다’라고 썼으니 천년 고찰이 즐비한 곳은 당연히 경주였을테고 분명 이 절집 이었을 것이다. 옥룡암은 추사 김정희도 다녀갔다. 김생의 금석문을 찾기 위해 경주 무장사로 내려왔던 추사가 일시 묵은 것으로 알려졌고 당시 추사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진 ‘일로향각’이란 현판이 지금도 걸려 있다’ 하략.
한편 동리목월문학관 교무처장이자 시인인 김성춘 교수는 ‘현대시’ 2016년 7월호에 최근 발표한 시 ‘옥룡암에서 2’ -陸史 생각-에서 육사 선생을 그렸다. 시 일부를 발췌했다.
‘초략// 흰 고무신 끌고 三笑軒을 나와/ 그가 부처바위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오른다/ 풀섶 사이 검은 뱀 한 마리 스쳐 지나간다/ 수척한 산과 하늘, 그 눈빛은 형형하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여긴 너무 춥고 캄캄해 저들은 저들의 앞날을 잘 몰라/ 내가 도착한 이곳이 어딜까 새벽은 다시 켜지고//’
끝으로, 본 기사에 자료(‘이육사 평전(저자: 김희곤, 도서출판 푸른 역사)’, ‘원전 주해 이육사 시선집, (저자:박현수, 펴낸곳: 예옥)’, ‘이육사 전집(편저: 김용직, 손병희, 도서출판 깊은 샘))’를 제공해주신 이육사 문학관측에 감사드리며 이 기사에 대해 제보를 해주신 독자 한 분(권오신 전 포항 MBC 보도국장이 쓴 글 제공)에게도 깊이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