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률사에 오를 때면 교직 생활을 하면서 늘 가까이 지내던 선배를 생각하게 된다. 자주 술잔을 나누고 때때로 몇몇 지인들과 함께 부부 간에 국내는 물론 해외여행도 자주 다니곤 했었다. 수년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이 절에서 천도재(薦度齋)를 올렸었다.
천도재란 사람이 죽으면 그의 명복을 빌어주는 의식이다. 죽은 날로부터 7일째 되는 날부터 49일째 되는 날까지 매7일마다, 그리고 100일째와 1년째, 2년째 되는 날 모두 합하여 10번 명부시왕으로부터 한 번씩 심판을 받는다. 이중에서도 49재를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명부시왕 중 지하의 왕으로 알려진 염라대왕이 심판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불교신자가 아니라도 49재만큼은 꼭 치렀다.
그 분의 49재가 있는 날 차마 법당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절 마당을 서성이며 마음속으로 그 분의 극락왕생을 기원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저승 백 년보다 이승 일 년이 낫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저승 길이 대문 밖’인 것이다. 이렇게 죽음은 늘 내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허투루 살아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다짐해 본다.
이 절은 이차돈의 순교와 신라의 화랑 부례랑을 구출한 만만파파식적에 얽힌 이야기 등 이적(異蹟)이 많이 일어난 곳으로 요즈음도 영험을 얻고자 찾아오는 불교신도들이 많다.
백률사는 대웅전과 응진전이 한 건물 내에 있다. 좌측은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를 하고 있는 대웅전 영역이고, 우측으로는 16나한을 모신 응진전 영역이다.
백률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하지만 신라 불교의 시원이 된 명찰이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이차돈이 순교한 후 자추사를 세웠다고 한다. 이 자추사를 백률사로 추정하고 있는데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건물을 1600년경에 경주 부윤 윤승순(尹承順)이 중건하고 대웅전을 중창한 기록이 있다.
현재 건물은 대웅전을 비롯하여 그 앞에 범종각, 뒤쪽으로 삼성각이 있고 한 층 아래 왼쪽으로 요사채가 있으며 뒤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 최근에 지은 송죽당이 있다. 절이라기보다는 암자 규모로 단출하다.
대웅전 건물은 약 3m 높이의 축대 위에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지붕 목조 기와집으로 지붕의 형태는 팔작이다.
안에는 삼존불을 모시고 있는데, 본존인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 이 대웅전 오른쪽으로 또 다른 석가모니 상을 중심으로 16나한상을 모셔 두었다. 대웅전 안에 응진전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례는 필자가 알고 있는 한 이 백률사가 유일하다. 아마 전각을 더 세울 장소가 없어 대웅전에 응진전을 포함한 듯하다.
대웅전 왼쪽으로 돌아서 올라가면 삼성각이 있다. 단칸의 자그마한 전각 안에 칠성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산신과 독성탱화를 걸어두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