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전기 경주 최고의 성역은 어디였을까? 바로 집경전(集慶殿)이었다. 집경전은 공자 위패를 모신 향교 성전보다 훨씬 엄숙하고 숭배하는 장소였다고 한다. 부윤이 부임하면 이곳부터 먼저 배알하였고, 관찰사가 순찰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경주시 북부동의 옛 경주여중 교사(현재 한국원자력환경관리공단) 동편 북성로를 따라 계림초등학교 쪽으로 가면 중간 지점에 철책으로 둘려 쌓인 돌더미가 있다. 이곳이 집경전지다. 집경전은 조선 태조의 어진(御眞)을 모셨던 건물로 임진왜란 이후 어진은 강원부로 옮겨지고 지금은 그 자리만 남아있다. 현재 남아있는 석구조물은 보관고로 추정 하고 있으며 정조의 친필로 새긴 집경전구기비가 남아있어 이 일대를 집경전지로 추정하고 있는 것.
집경전지에는 잡초들이 석조물 사이사이로 삐죽히 자라고 있었다. 태조 어진이 있었던 자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허술해 보였고 집경전지 철책 주변에는 아무렇게나 주차해 놓은 자동차들이 이 터의 의미조차 간과하는 듯했다. 속히 간단한 정비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재과 관련팀은 “아직은 집경전 자체가 비지정문화재로, 현재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해 학술용역이 추진되고 있다. 문화재로 지정되면 예산을 확보해 정비 및 복원 계획을 수립할 수 있다. 학술 용역이 끝나봐야 알겠지만 태조의 어진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문화재 지정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학술용역은 올 8월 정도면 완료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본 기사는 조철제 선생의 조선시대의 경주를 재발견할 수 있는 저서인 ‘또 다른 경주를 만나다’에서 발췌 인용하고 자문을 바탕으로 구성했다.
-태조 이성계, 새 왕조 구심점 필요... 전국 주요 고을 및 경주에 집경전 둬 어진 봉안케 해
집경전지 석구조물을 자세히 보면 외형은 4각형 터널 모양으로 구축돼 있고, 겉보다 내부가 훨씬 더 정교하게 쌓여 있다.
석조물 전체 높이는 약 3미터, 남북 길이는 약 8미터, 동서 길이는 약 6미터다. 장방형으로 거대한 석재로 운반해 쌓았는데, 덮개돌은 장대석 또는 당간주를 가져와 얹었다.
주위를 살펴보면 축조물 전체가 상당히 내려앉았다. 본래 이곳 지반이 매우 약하고 서남쪽에 큰 연못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석조물 위 다시 목조 건물을 올렸으니 당시의 규모는 매우 우람하면서도 위압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주위 민가에 묻혀 있어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조철제 선생은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후 나라를 자손만대에 물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먼저 새 왕조에 대해 민심을 집약시킬 수 있는 어떤 상징성과 구심점이 필요했을 것이다. 고려는 망했으나 민심은 여전히 전조(前朝)를 동경하고 있었고, 새 왕조의 전통성 결여가 이태조의 마음을 또한 무겁게 했을지도 모른다. 이 같은 맥락에서 전국 주요 고을에 이성계의 어진, 곧 자신의 영정을 봉안하게 했을 것이다”고 했다.
개성에 목청전, 평양에 영숭전, 영흥에 선원전, 전주에 경기전, 경주에 집경전을 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선원전과 경기전은 이성계의 고향과 관향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나머지는 모두 선민의식이 높은 고도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조선 전기 경주에 관해 기사 중 집경전이 가장 많이 나타난 것은 이 때문이다. 태조 어진을 경주에 최초로 봉안한 것은 태조 7년(1398)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조는 판삼사 설장수를 시켜 자신의 영정을 계림부에 봉안하게 하고 이를 어용전으로 불렀다.
이로써 경주에 진전(眞殿)이 설립된 것이다. 세종 24년(1442)에 전주 경기전, 평양 영숭전과 같이 경주 어용전에 ‘집경전(集慶殿)’이란 전호를 내리고, 전 지기 2명을 두었다. 경기전은 집경전의 규모를 본떠 세웠다.
그런데 집경전 석조물의 축조 연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으나 태조와 세종 연간으로 추측할 수 있다. 처음 어진은 목조 와가의 전각에 봉안했다가 만세 불후를 고려하여 돌로 쌓았을 것이다.
지금 석조물을 세로로 지어 있는데 건축상 그 구조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조선 시대 왕릉 재사는 정자각(丁字閣)이다. 현재 전주 경기전의 건물도 ‘丁’ 자 모양이다. 세로로 통해 전각 안으로 들어가면 ‘一’ 자 형의 건물 가운데 어진을 모셔 두었다. 석조 건물은 본전(本殿)으로 견실하게 축조한 것이지, 참봉 등이 거처하는 부속건물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남은 석조물은 본전의 일부 건물로 밖에 볼 수 없다. 곧 ‘丁’ 자 건물의 세로 구조물인 것이다. 따라서 남북에는 벽면이 없다.
어진이 온습에 잘 견딜 수 있도록 하기 위해 ‘一’ 자 형 건물은 목조물이고 입구 건물은 견고한 돌로 쌓았던 것이다. 1987년 12월에 이곳을 발굴한 결과 ‘一’ 형 건물 터는 발견되지 않았고, 반대편에 건물 터가 있었다고 한다.
-경주 객사 동경관과 거의 같은 자오선 위치에, 임란 이후 집경전 터 심하게 훼손
임진왜란 이후 민가 중심지에 있었던 집경전 터는 심하게 훼손되었고 읍성을 새로 축조하면서 많은 석재가 필요했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바라보면 경주 객사 동경관의 대청과 거의 같은 자오선 위치에 있다. 객사는 관원이나 내빈이 유숙할 뿐 아니라 금상(今上) 전하의 위패를 봉안한 전패(殿牌)가 있었다. 객사에서 보면 전패 뒤 2~3백 미터 남짓 되는 지점 집경전에 태조 어진을 봉안하고 있어서 일체이위(一體二位)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세조 8년(1462) 부근에 사는 양민 20명을 차출해 돌아가며 수직시켰고 예종 1년(1469) 제향을 받들 때 시계가 없어서 때를 놓친 일이 있다고 중앙에 알리자 공조에서 물시계와 해시계)를 만들어 보냈다.
성종 25년(1494) 객사에 화재가 났을 때 나라에서 관리를 보내 집경전에 위안제를 지냈고, 명종 7년(1552) 객사에서 다시 큰 화재가 발생해 대청과 서루 등이 전소했다. 화재를 진압할 때 선령(先靈)이 놀랬다 하여 도승지 권철을 보내 위안제를 올렸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진부터 서둘러 옮겼다. 집경전 참봉 정사성과 홍여률이 어진을 양동 수운정에 임시 대피시켰다가 안동 도산서원에 모셨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다시 영월을 거쳐 강릉 객사 임영관으로 옮겼고, 그 후 임영관 옆에 집경전을 지어 어진을 봉안했다.
인조 9년(1631) 강릉 집경전에서 화재가 발생해 어진은 소실되고 말았다. 인조는 그 책임을 물어 강릉부사 민응형에게 곤장 1백대를 때리고 2천 리 밖으로 유배시켰다. 이는 당시 태조 어진의 상징적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보여주는 예다.
-경주 유일의 어필(정조 친필) ‘집경전구기(集慶殿舊基)’비 남아있어, “집경전 복원에 중지모아야 할 때”
집경전은 임진왜란 병화로 석조물만 남겨두고 거의 불에 탔다. 강릉 집경전이 소실된 이후로 경주 인사들은 기회가 있을때마다 나라에 글을 올려 경주에 집경전을 다시 건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조때에 이르자 경주 인사들의 여론은 더욱 들끓었다. 질암 최벽은 정조에게 집경전 중건에 따른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마침내 정조 22년(1798) 정조는 전우를 다시 지어 태조 어진을 봉안하지 않고, ‘집경전구기(集慶殿舊基)’라는 다섯 글자를 써서 그 자리에 비를 세우게 했다. 집경전의 존재를 신성시하고 경주 인사들의 요청을 달래기 위한 포석이었다. 이 비석의 전면에는 집경전구기라고 씌어 있는데 이는 이 자리가 바로 ‘집경전의 옛 터’ 라는 말이다.
현재 한국원자력환경관리공단(구 경주여자중학교) 내 정원에 집경전구기 비석이 있다. 세로로 쓰인 이 글씨 옆 위쪽에 작은 전서체로 ‘어필’이라는 두 글자가 보이는데 어필이면 ‘임금님의 글씨’라는 뜻이며 조선 22대 정조대왕의 어필임을 알 수 있다. 2백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비면과 서체에 아무런 손상이 없고 다만 이끼가 조금 덮여 있을 뿐이다.
조철제 선생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집경전구기첩(1798년, 정조 22년)이라는 책자가 있다. 이 책에는 비각과 주변을 그림으로 나타내고 비각 규모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자료에 의해 비각을 다시 짓는다면 거의 원형대로 복원 할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집경전은 아무도 관리하는 이가 없었다. 기와는 흘러 내렸고 담장은 무너졌다. 1939년 주변 아이들의 불장난으로 실화해 비각은 전소됐으며 외삼문은 허물어졌다. 1945년 경주공립실과중학교가 설립돼 집경전 부지는 대폭 축소됐으며 1964년 동편 교사가 증축되자 비각 터 마저 없어지고 말았다. 비석을 비롯해 많은 석재는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조철제 선생은 “1987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 의해 발굴될 때 지반 시굴 조시와 지상 구조물을 해체 복원한 조사기 이뤄졌는데 결과는 엉뚱하게도 엽전을 주조한 주전소(鑄錢所) 운운하는 말이 나와서 무척 안타까웠다”면서 “경주 유일의 어필 비석이 비각도 없이 홀로 서 있는 모습을 볼때마다 금석(今昔)의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제라도 집경전 구기에 비석을 옮겨와 비각을 세워야 한다. 집경전을 본떠 건립한 전주 경기전을 눈여겨 보며 집경전 복원에 대해 중지를 모아야 할 때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