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희망, 행복, 사랑, 이런 거 말고 걱정이 주인공이다. 부정적인 감정에는 걱정뿐 아니라 공포감, 죄책감, 혐오, 슬픔 등이 있다. 남자, 특히 한국 남자들은 이런 부정적인 감정에 어색하다.
남자는 눈물 흘려서도 안 되고, 공포에 대한 감정에 쉽게 노출하면 안 되는 것으로 배웠다. 오죽하면 중·고등학교 때 선생님한테 몽둥이찜질(지금은 학교 폭력을 단호히 거부한다)이라도 당하면 뒤로 돌아 나오면서 씨~익 웃거나 우스꽝스러운 표정이라도 지어야만 했다.
눈물자국이 눈에 선명하지만 입은 어설프게나마 웃고 있어야 맞은 학생도, 그걸 지켜보고 있는 학우들도 안심을 했다. 감정을 노출하는 것은 나약한 짓이라 믿는 마초이즘(machoism)의 확인 과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불쌍하고 어리석은 추억이었고 또 그런 대물림의 장(場)이었다.
하지만 동전도 그렇듯 감정에도 양면은 있다. 작은 부정적 감정은 더 큰 사고를 사전에 막는 긍정적 기능이 있다. 공포는 우리에게 잠재적인 위험을 경계하고 무서운 것을 피하게 만들며, 걱정은 우리에게 주변이나 우리의 마음속에 혹시 있을지 모를 문제나 위험을 찾아내도록 만든다.
혐오는 해롭거나 병을 유발할 수 있는 것을 미리 피하도록 만들며, 모욕감과 죄책감은 부정적인 결과가 초래되는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부정적 감정은 마치 ‘화재경보기’와 같다. 알다시피 화재경보기는 불이 났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장치다. 화재경보기가 오작동 될 때는 두 가지 경우다. 불이 나지 않았는데도 경보가 울리거나 불이 났는데도 경보가 울리지 않을 때다. 앞의 거짓 양성반응(false positive)의 결과는 그다지 치명적이지 않지만, 뒤의 거짓 음성반응false negative)의 결과는 치명적이다. 불이 났는데도 경보기가 울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니 화재경보기 센서(sensor)를 조절할 때는 반드시 화재감지 수준을 ‘민감’하게 설정해두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따금씩 잘못된 경보를 울리는 한이 있더라도...
불이 나지 않았는데도 화재경보기가 울어 건물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비를 쫄딱 맞고 서있어야 할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경보기가 민감하니 위급할 때에는 반드시 경보를 울릴 거라는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불이 안 났는데도 경보가 울리는 걸 피하기 위해 센서를 덜 민감하게 조절해 두면 정말로 불이 났을 때 경보가 울리지 않아 사람이 죽을 수도 있으니까.
부정적 감정도 이와 흡사하다. 부정적 감정은 본래 포식동물에 잡아먹힐 위험, 사회적 지위를 잃을 위험, 또는 사회에서 추방당할 위험 같은 심각한 위험을 탐지할 목적으로 설계된 것이다. 진화심리학의 주장이다. 이상의 위험은 우리 조상에게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실제 위험을 탐지하지 못했을 때 치러야 할 비용을 감안하면, 자연선택이 부정적인 감정을 민감하게 설계한 것은 매우 타당하다. 다소 근거 없는 걱정을 하는 편이 잡아먹히거나 굶어죽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을 민감하게 설계한 데에는 많은 비용이 따른다. 걱정이라는 부정적 감정이 설계에 따라 작동하는 순간에도 사실 대부분의 걱정은 거의 근거가 없는 것들이다. 가령 누군가를 아프게 한 경험이 있다고 하자.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 고민으로 쉽게 잠 못 드는 그런 경험 말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 고민은 사실 쓸데없는 걱정일 확률이 높다. 진짜 문제는, 이런 경험이 역시나 이런저런 쓸 데 없는 걱정으로 잠 못 이뤘던 조상을 둔 탓이라는 점이다. 별 걱정 없이 잠을 잘 자던 조상이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 해석하다가 때로 치명적인 판단오류를 범해 공격을 받거나, 잡아먹히거나, 마을에서 내쫓길 수도 있다.
그럴 바엔 차라리 걱정이 좀 과하다 하더라도 생존을 위해서는 쓸데없는 걱정이 더 낫다는 말이다. ‘걱정도 팔자’란 말이 그래서 나온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