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아몬드는 그리스어로 ‘부스러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아다마스(adamas)’라고 한다. 이것이 중국에 전래되면서 금강석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모든 물질 중에서 가장 단단하고 변하지 않는 것으로 로마에서는 처음 연마제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이후 인도에 수입되고부터 장식, 호부의 뜻이 가해져 애용되었다. 이후 불사리(佛舍利)에 이용되거나 불상의 눈과 백호에 상감(象嵌)하는 등의 용도로 쓰이기도 하였다. 이 금강석이 불교에 유입되면서 경전의 명칭,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 무기 등에 등장하게 된다. 이와 관련이 있는 경전으로는 불도를 닦아서 번뇌를 제거함으로써 사람들이 본디 가지고 있는 깨끗한 마음 즉 부처가 될 바탕을 깨닫게 해야 한다는 것을 설법하는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이 있고, 또 우리나라 조계종의 근본 경전인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등이 있다.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으로는 코끼리 100만 마리의 힘에 버금간다는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있다. 그리고 금강역사의 무기인 금강저(金剛杵)는 일체의 번뇌를 깨뜨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상징한다. 지금부터 12년 전 문화관광부에서 후원하고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에서 주관하는 ‘통일을 향한 첫걸음’이라고 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금강산을 답사한 적이 있다. 옥류담, 상팔담, 구룡폭포, 만물상 등의 절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중국 북송의 소동파가 ‘고려에 태어나 금강산을 한번 보기가 소원이다(願生高麗國一見金剛山)’라고 했다는 옛말이 그냥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통행로 이외에는 엄격하게 출입이 통제되고 온통 구호로 어지럽혀져 있어 무척 안타까웠다. 그런데 우리 경주에 있는 소금강산이 진짜 금강산이다. 높이 177m에 이르는 자그마한 산으로 경주의 북동쪽 용강동, 동천동과 천북면의 경계에 있는데 현재 소금강산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는 아래와 같이 소금강산이 아닌 금강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 6촌 중의 하나인 금산가리촌에서의 금산은 지금의 금강산으로 백률사 북쪽에 있는 산이다”, “6촌 중의 하나인 명활산 고야촌장인 호진이 처음 금강산으로 내려왔다” 금강산은『삼국유사』이외에도 여러 문헌에서 그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 간행된『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소금강산 아니라 금강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조선시대의 지리지와 지도에는 모두 금강산으로 표기되어 있고, 소금강산이라는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멸망하는 신라에 대해 울분을 삼키며 마이태자가 찾은 곳도 『삼국사기』기록에 의하면 금강산이 아닌 개골산이었다. 금강산 정상 부근. 등산객들의 발걸음이 지나치게 잦아 산이 크게 훼손되고 있어 안타깝다. 세월이 흘러 강원도의 금강산이 절경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이곳 경주의 진짜 금강산이 소금강산이 되어버린 것이다. 통일신라 이전에 동악 토함산, 서악 선도산, 남악 금오산, 북악 금강산, 중악 낭산을 왕경오악이라 하여 신성시 하였는데, 특히 금강산은 나라의 큰 일이 있을 때 이곳에서 화백회의를 하고 조선시대에는 이 산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산의 남쪽 기슭에는 탈해왕릉과 표암, 마애지장보살상 등이 있고 서쪽 기슭에는 굴불사터 사면석불, 산허리에는 신라 불교의 시원이 되는 전설을 간직한 백률사, 산 정상 동쪽 바로 아래로는 마애삼존불상이 있고 그 아래로는 확인이 되지 않은 절터가 있다. 또 이 산으로부터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헌덕왕릉, 용강동 고분, 동천동 사방불 탑신석 등의 문화재가 산재하고 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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