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라는 도시가 가진 유무형의 역사문화유산과 더불어 도시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을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던 이번 기획은 이번호(오래된 가게(3))로 마무리한다.
취재를 위해 경주시 시민위생과 식품위생계와 공중위생계에 자료를 의뢰했으나 별로 신통치 않았다. 한 가지 업종에 계속 종사한 경우는 더러 있었으나 한 장소에서 그 업을 지속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폐업의 경우도 많아 ‘오래된 가게’ 집계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세 번에 걸친 이번 기획을 마치면서 미흡하고 아쉬운 점이 많지만 우리의 지혜, 우리의 삶, 나의 추억이 살아있는 도시 속 오래된 가게에 대한 환기와, 오래된 도시 조직 유지를 통해
고도(古都)의 정취를 배가시킬수 있는 장치로서의 장소성에 주목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을 수 밖에...
단지, 역사를 가진 지역에서 예전 것에 대해 ‘켜’를 가지고 보존해야 한다는 원칙 하나 정도는 알리고 싶었다.
-월성군 자동차 정비 1호...‘월성자동차정비공장’, 지역사회에서 두터운 신망 얻어
안강읍 양월리에는 2대째 이어가고 있는 자동차정비 공장이 있다. 바로 ‘월성자동차정비공장(대표 신영식(70))’이다. 이 공장은 여타 정비 업체의 상도덕의 기준이 되는 업체로 원칙을 준수하는 것은 물론, 정비 일과 함께 지역사회에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 신영식 대표는 1969년, 지금의 장소 건너편에서 이 일을 시작해 1977년 확장이전했으니, 47년째 이 일을 하고 있는 것.
한문에 정통했던 신 대표는 고서를 두루 섭렵했던터라, 부산의 모 회사 사무과 행정직에서 일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부산에서 탈선된 전차 아래서 수리를 하던 기사의 모습에 반해 전기 기술에 입문하게 되는데,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비교적 기술 습득하기엔 나이가 많았던 25세때 일이었다. 전기 기술일을 배우겠다는 신념으로 전혀 다른 일을 시작한 것. 69년 기술자 한 명을 데리고 안강으로 오게되고 이익금을 그 기술자에게 월급으로 다 주면서 미흡한 기술을 완득하게 된다.
당시는 주로 자동차 전기, 즉 자동차 배터리를 제작하는 기술을 익혔다고. 점차 사세가 커지면서 천일 화물취급소 일도 병행했다. 1972년 자동차 전기기능사 자격증을 획득하고 1979년 정식 허가를 정부로부터 받는다.
“경주시 전역에선 황오동에 있는 ‘통일정비공장’에 이어 우리 공장이 2호입니다. 월성군내에선 자동차 정비 1호였습니다. 당시 정비공장은 두 곳 뿐이었지요”
지금은 장사가 예전에 비해 덜 되는 편이라고 한다. 신 대표는 “예전에는 비포장 도로가 많아 자동차 고장률이 높았습니다. 지금은 농로까지 포장이 돼 있으니 차 마모가 덜하고 자동차 제작 기술력은 워낙 좋아졌으니 자연스레 일이 줄었지요”라고 했다.
이 일이 가장 번성했을때는 산업화 시대가 본격화되던 80년대였다. 그는 “당시 기술자만해도 이 작은 공장에 17명이었고 안강에서 ‘풍산금속’ 다음으로 우리 공장이 컸습니다”고 회상했다.
힘든 상황도 있었다. 글래디스 태풍이 와, 안강읍 전역이 침수될 정도였을때 이 공장의 피해도 막심했다고 한다. 고철로 전락하고 만 기계들 앞에서 망연자실하던 신 대표는 오뚝이처럼 다시 재기에 성공한다.
한편, 촉망받던 물리학도였던 아들도 17년전부터 이 일에 합류하고 신 대표는 경영을 맡고 있다고 했다. 이 공장은 경쟁적으로 견인차를 내보내는 여타 업체와는 달리 그는 견인차를 절대 내보내지 않는다. 연락이 와야 내보낸다는 것이 원칙이다. 이는 신 대표가 윤리와 도덕 공부를 오래 한 소치다.
“이 좁은 지역사회에선 신뢰가 바탕입니다. ‘청심정행(淸心正行)’ , 정신은 맑고 행동은 바르게 하라고 늘 강조합니다”
이 업체가 오늘까지 건재한 것은 기술력은 물론이고. 얄팍한 상혼이 아니라 신 대표의 인문학적 지혜를 바탕으로 하는 상도덕의 신념에서 연유한다.
신 대표는 안강라이온스 회장, 전 한국서예협회 경주지회장, 전 경주문화원 부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안강 안맥회 고문, 성균관 유도회 안강지회장 등을 지내고 있다. 또, 제9회 경주시문화상을 수상 한 바 있으며 고명 서실을 운영하고 있어 지역사회에서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다.
-‘감포선구점’...“부친이 편찮아지면서 이 일을 도맡게 됐습니다”
비릿한 바다냄새가 진동하는 감포 항구 변에는 감포항 어부들에겐 반드시 있어야하는 선구점이 두 곳(‘감포선구점’, ‘신일상회’) 있다. 두 곳 모두 50년간 건실하게 선구류 일체를 다루고 있는 가게다.
그 중 박철형(50) 대표가 운영하는 ‘감포선구점’을 다녀왔다. 박 대표의 부친(고 박용완 씨)이 1966년 감포선구점으로 개업한 이래로 지금까지 영업중이므로 50여 년의 세월이 굳건한 것. 손때 묻은 낡은 가격표와 오래된 책상과 빛바랜 서랍이 그간 감포선구점의 시간을 반증한다.
사람좋은 미소를 늘 머금고 있는 박 대표가 이 가게를 맡은 것은 22세때였고 지금까지 28년간 맡아 일해 오고 있다.
“아버지 일을 돕고 있다가 부친이 편찮아지면서 이 일을 도맡게 됐습니다. 가장 성시를 이뤘을때는 20년 전쯤 90년 중반으로, 오징어잡이가 호황이어서 관련용품이 잘 팔렸죠”
크고 작은 선박을 가지고 있는 선주들이 이 가게 단골들이며 주로 선구 일체, 즉 어망, 로프, 부의(감포말로는 ‘부자’), 어장용 스티로폼, 통발, 자망그물, 트롤선, 배 검사품 일절, 철물, 잡화 등을 다루고 있다.
“지금은 어획량 자체가 줄고 동해안 원자력 부근 어장이 사라지는가하면, 몇 년 전부터 중국어선이 오징어 불법 포획으로 어획고가 현격히 감소하는 등의 원인으로 장사가 예전같지 않습니다”
박 대표는 “오징어잡이 일이 급격히 줄어 어민들 고통이 큽니다. 불법 중국어선 출현에 대해 당국에서 속히 해결을 해 어민들 어획고가 풍요로워져 그들의 생활이 나아졌으면 좋겠습니다”며 바람을 전했다. 앞으로도 이 일을 계속할 것이라는 박 대표는 현재 (재)감포장학회 사무국장, 복지법인 ‘해송’이사, 주민자치위원, 감포깍지길 알림이 사무국장 등의 활약을 통해 지역사회에서 좋은 일에 앞장서며 더불어 살고 있다.
-‘전촌할매횟집’...“우리 식당에 온 손님들은 행복하다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감포읍 전촌리에는 ‘전촌할매횟집(박순옥, 65)’이 있다. 회국수, 회밥, 물회, 모듬회 등이 주요 메뉴인 이 작고 아담한 식당은 주요 방송 채널에 소개된 유명한 맛집이다. 책자에 소개된 것은 물론, 한창 방송 전파를 탈때는 줄을 설 정도였고 경찰이 교통지도를 해 줄 정도로 붐볐고 지금도 늘 손님들이 끊이지 않는다. 박 사장이 이 가게를 인수한지는 10년째다.
“이전에 고모님의 세 자매가 이 자리에서 50년 영업을 하셨으니 이곳에서만 60년째입니다”
오래된 집 특유의 정감이 넘쳤지만 잘 닦여 윤기가 흐르는 타일과 부엌에선 정갈함이 묻어난다. 깐깐한 사감 같기도 한 박 사장은 대충 넘어가는 ‘할매’ 스타일이 아니다. 또박또박 명확하게 자신의 영업 원칙을 말하는 박사장은 식당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할머니’와는 달랐지만 특유의 온화한 활기가 넘쳤다.
박 사장이 가게를 연 이후로 한 번도 식당 문을 닫아 본 적이 없고 자연산 선어만 취급해 그날그날 전량을 소진한다. 양식 횟감을 팔면 더 오랜시간 영업을 할 수 있지만 그날 횟감이 떨어지면 어김없이 장사를 마치는 것.
“화학적인 감미료는 일절 사용하지 않고 위생도 철저하게 점검하는 것은 물론, 초고추장이나 된장, 육수 등의 ‘재료’를 중시하는 것이 철칙이자 원칙입니다. 재료가 좋은 곳을 다 알고 있어서 전국을 돌며 그런 재료들만을 찾아 구입해옵니다”
친절 또한 박 사장의 주요 원칙이고 철칙이다. 또 한 가지는, 처음 시작할 당시의 초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라고 한다.
“인수할 당시엔 손님이 전과는 달리, 많이 줄어서 처음엔 갈등도 생겼지만 꾸준히 좋은 재료와 정성을 들인 결과 다시 손님들로 넘쳐났습니다. 결국은 맛으로 고객들이 알아줍디다. 물론, ‘할매’ 덕을 본것도 많구요(웃음)”
“매상을 많이 올리는 것보다 양심적으로 손님 한 분 한 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손님이 정성을 알아주지 않고 소홀히 대할 때 솔직히 섭섭할때도 있지요”
모든 재료는 국산을 고집하고 생강도 일일이 손으로 깎는 등 손으로 장만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상을 치우지 않고선 손님들이 아무리 몰려도 식당에 들이지 않습니다. 깨끗하게 상을 치우고 손님 받을 준비가 돼야 손님을 들어오게 하지요”
함께 10년간 일해 온 주방 아주머니가 일러줘서 그 ‘좋은 일’이 들통나긴 했지만 박 사장은 선행도 많이 한다. 지역의 독거노인 9명을 돌보는가하면, 운전을 하다보니 지역 어른들도 잘 모셔 드린다. “칭찬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편하려고 하는 일입니다”고 하는 인정 넘치는 박 사장은 시장 노점에서 어르신들이 파는 필요도 없는 물건을 사오기도 한다.
이 가게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사령관 시절 다녀간 것을 비롯해 유명 가수나 탤런트, 정재계 주요 인사들, 각국의 주한대사들도 다녀갔다고 한다.
박 사장은 손님들이 맛있게 싹싹 그릇을 다 비우면서 ‘오래오래 건강하게 맛있는 음식해주세요’라고 할 때 몸은 힘들지만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할매’와의 인터뷰를 마칠 즈음 25명 단체손님들이 또 들이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