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내 사생대회 준비로 아들 녀석은 스케치에 열심이다. 쓰레기통에는 이미 구겨진 종이가 수북하다. 그림 주제가 ‘부엌에 숨어 있는 영웅들’이라나. 키가 제일 큰 냉장고. 뿔 달린 식탁 그리고 싱크대 삼총사가 부엌을 지킨다는 초등학생적인 발상이다. 커다란 안경을 끼고 있는 냉장고 영웅(?)은 삼겹살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환풍기처럼 생긴 로봇 팔도 달려있다. 아직도 이렇게 유치한 상상을 하느냐가 아니라, 문제는 이 녀석이 바라보는 세상이 아빠나 어른들이 보는 세상과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아이들 블록 장난감 회사로 유명한 레고(Lego) 회사는 광고를 해도 이렇게 한다. 광고지 한 가운데 공룡 형태의 블록 두 세 조각이 놓여 있다. 그 아래에는 플라스틱이 아닌 실제 티라노사우루스 같은 공룡의 실루엣을 한 그림자가 붙어 있다. 그게 다다. 무슨 광고에 글자 하나 안 보인다. 아주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광고다. 그런데도 클리오(CLIO)나 깐느(Cannes) 국제 광고제 같은 데에서는 매해 이런 무성의한 광고에 큰 상을 안기곤 한다.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그럴까?
색깔도 매우 촌스러운 그 광고 시리즈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선명하다. ‘엄마, 아빠 눈에는 플라스틱 블록 조각 몇 개가 보이나요? 댁의 아이들은 살아 있는 티라노사우루스가 보이는데?’란다. 손톱만한 조각들이 뭐가 이렇게 비싸? 하고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어른 눈에는 그저 노랗고 파란, 그러나 아주 비싼 플라스틱으로 보이겠지만, 그걸 가지고 노는 아이들은 위에서는 그림자로 표현했지만 실제 끼~익 하고 울어대는 무서운 공룡으로, 자동차로, 로켓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루 종일 그걸 만지작거리는 것이다.
이 사실을 간파한 레고 사 광고에는 ‘우리 제품 좀 사주이소’ 하는 읍소형 문구 하나 안 집어넣는다. 아주 건방지기까지 한 이 광고 한 장으로, 이래도 당신 주머니에서 지갑 안 꺼낼 거야?, 당신 아들 친구들은 이걸로 무한한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데도? 하고 훈계(!)하는 것이다.
손톱만한 플라스틱 조각 몇 개로도 이렇게 인식의 맥락이 달라진다. 불교 경전에 똑같은 물이지만 뱀이 마시면 독이 되고,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며, 사람에게는 갈증이 해소되는 물이라고 한 것도 같은 이치다.
보통, 종이에다 집 한 채 그려보라고 하면 우리는 지붕부터 그린다. 그런 다음 세로로 기둥 몇 개를 그리고, 그런 다음 가로로 줄 하나를 그어 땅임을 표시하는 순서로 말이다. 스케치로 바쁜 아들한테도 시켜봤더니 역시 그렇게 그린다. 집을 그리랬더니 아파트를 그리기에 일반 가정집을 그려 달라 다시 부탁을 했지만 말이다.
인식(認識)이 이처럼 다르고 때에 따라서는 위험할 수도 있겠다 싶은 건, 얼마 전 타계하신 신영복 선생의 글을 읽고 나서다.
“…그는 왕년 목수 시절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집을 그렸다. 땅바닥에 나무꼬챙이로 아무렇게나 그린 집 그림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집 그리는 순서 때문이었다. 주춧돌부터 그렸다. 노인 목수는 주춧돌부터 시작해서 지붕을 맨 나중에 그렸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아, 일하는 사람은 집 그리는 순서와 집 짓는 순서가 같구나. 그런데 책을 통해 생각을 키워 온 나는 지붕부터 그리고 있었구나’”
사실 지붕부터 그릴 수는 없다. 공중에 떠 있는 지붕은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우린 아무런 생각 없이 지붕부터 그려왔을까.
신 교수는 생각은 각자가 살아온 삶의 결과라서 그렇다고 말한다. 지붕부터 그릴지 주춧돌부터 그릴지는 철저히 그 사람의 살아온 과정에서 결정된다는 말이다.
하얀 종이에 집이 완성되어져 가는 절차와 과정은 그렇기에 완고하다. 설득하거나 주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집을 직접 지어본 목수에게는 특히 말이다. 생각은 각자 살아온 삶의 결론이기 때문이다. 부엌과 하다못해 레고 조각 하나에도 우린 너무나 다른 삶을 동시에 같이 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