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장군의 묘가 알려지게 된 것은 조선 숙종 36년(AD 1710) 당시 경주부윤이던 남치훈(南至熏)이 현재의 위치에 묘비를 세우면서부터다.『삼국사기』에는 ‘장군이 돌아가시자 금산원에 나가 장사지내게 했다’고 하고, 『삼국유사』에서는 ‘능이 서산 모지사의 북쪽이며 동쪽으로 향해 뻗은 봉우리에 있다’고 하여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금산원과 모지사의 위치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에 김유신장군묘의 진위에 대해 일제강점기에는 일인학자들, 해방 후에는 국내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 세끼노데이(關野貞)와 이마니시따쯔(今西龍)가 각기 다른 주장을 했다. 세끼노데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김유신장군묘를 부정하였다. 『삼국사기』 「열전」에 김유신이 세상을 떠나자 ‘금산원에 장사하고 비를 세워 그 공을 영원히 남기도록 했다’고 했고, 『삼국유사』에서는 ‘능은 서산 모지사의 북쪽, 동으로 뻗은 봉우리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현재의 금산의 위치와 모지사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또 『삼국사기』「열전」의 김양의 장지에 대해서 ‘김유신을 태종왕릉에 배장한 것처럼 김양 또한 태종왕릉에 배장했다’라고 해석하고 김인문의 무덤을 김유신장군의 묘라는 것이다. 그리고 김인문의 무덤과 김유신의 무덤이 서로 바뀌었다고 하고 그 이유를 김유신이 아무리 공이 크다 할지라도 태종릉 보다 더 화려한 묘를 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인문은 당나라 고종의 신임이 두터워 나당이 서로 싸웠을 때는 신라왕으로 봉해진 일도 있는데 현 김유신장군묘의 묘제는 당나라 고종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니 그것이 김인문의 묘라야 한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이마니시다쯔는 김유신묘가 틀림없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1968년 서울대에 재직하고 있던 이병도가 김유신장군묘가 잘못 전해져 왔다는 새로운 학설을 발표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그의 주장에 대해 김해 김씨이자 연세대에 재직하고 있던 김상기가 즉각 반론을 제기했다. 두 사람의 논쟁은 조선일보(1968.9.24)에 이병도가 인터뷰 형식을 빌어 ‘사적21호는 김유신묘가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기사화하면서 비롯되었다. 1300년의 풍상을 침묵 속에 지켜온 한 고분이 엄청난 논쟁의 회오리를 몰고 온 셈이었다. 이병도의 주장은 한마디로 지금까지 김유신묘로 전해진 묘는 신무왕릉이며, 무열왕릉 동편에 있는 김인문묘가 김유신묘이고, 김인문묘는 이미 봉토가 허물어져 평지화 되어 그곳에 서악서원이 세워졌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김상기는 이병도의 주장은 50여년 전 일본인 세끼노데이가 들추어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같은 무렵 김해김씨 종친회는 앞으로도 사적21호에서 조상에 대한 제사를 계속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병도는 김상기의 반론에 대해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몇 가지 반증을 또다시 제시하였다. 이어 이병도는 논문을 7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함으로써 논쟁은 더욱더 세간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김상기 역시 한국일보 지상을 통해 반론을 거듭 제기하였고, 1969년 초에 ‘김유신묘의 이설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고고미술에 장편의 논문을 실었다. 양씨의 주장은 이 두 논문으로 일단 정리된 셈이지만 아직도 학계의 정설로서 정립되지 못한 채 사학계의 묵은 과제로 남아 있다. 이후 1973년 강우방은 현재의 김유신묘가 맞으나 원래의 모습이 아니고 36대 혜공왕 대에 개수하였다는 설을 제기하였고 향토사학자인 권오찬도 1979년 비슷한 맥락에서 김유신 묘가 맞다고 하였다. 이근직은 『신라왕릉 연구』에서 김인문묘를 김유신묘로 보고 있으며 현 김유신묘는 경덕왕릉으로, 또 현 경덕왕릉은 소성왕릉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유신장군묘의 진위 여부는 금산원이나 모지사의 위치가 밝혀지거나 묘를 조성할 당시에 세웠다는 묘비가 발견되기 이전에는 확인 할 길이 없을 듯하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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