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이 멀다하고 동네 풍경이 변하는 요즘이다. 묵묵하게 자신의 생업을 지키고 버텨 온 이들과 그 장소성에 주목하고자 하는 이번 기획을 준비하면서 기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들에게 오랜 장소성과 성실함에 어울리는 댓가를 치러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난호에 이어 경주의 오래된 가게(2)편을 준비하는 과정은 참으로 힘들었음을 토로한다. 인터뷰 섭외부터 이번 기획의도와 부합하는 콘텐츠를 발굴하기 어려웠다. 한 직종을 4~50년 간 같은 장소에서 해 온 가게가 드물기도 했지만 설혹 발굴했다하더라도 삼고초려를 했는데도 끝까지 고사한 이들이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수작업에 의존하고 시류와는 동떨어졌지만 고집스럽게 일하고 있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힘든 가게 운영을 못버티고 그만두는 이들이 많은 가운데 이들도 명맥만 겨우 이어가는 상황이 많았다. 다음호에서는 ‘오래된 가게’에 대한 경주시 관련자들의 의견과 비전을 함께 반영하려한다. -오현환 대표의 ‘시민자전차 상회’, 이제는 술도 한 잔 나누고 시름도 덜어주는 사랑방 역할 시민의 발이 되어 주라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인 ‘시민자전차 상회(오현환 대표, 65)’는 오 대표와 친구들의 존재 그 자체다. 황남동 국당리 작은 다리를 건너기 전부터 조마조마했다. 혹여 자전차 상회가 사라진 것은 아닐까하는 기우에서였다. 그러나 여전히 자전차상회는 건재했다. 내남 사거리를 지나 오릉 가까이에 70년대 골목 어귀에서나 혹은 향수를 자극하는 드라마에서나 등장할법한 녹이 슬어 찌뿌둥한 간판이 하나 걸려있다. 바로 ‘시민자전차 상회’. 빛바랜 흰 페인트 칠 위에 또박또박 쓰여진 검은 고딕체 글씨는 쇠락해가는 자전차 상회의 자화상인 듯하다. 그 간판의 외양만으로도 가슴 한 켠이 저려 온다면 넉살이 심한 걸까. 괜한 페이소스라 나무랄까. 시류와는 상관없다는듯한 간판에서 쥔장의 고집을 엿볼수 있다. 이 수상쩍은 ‘오래됨’은 요즘 SNS의 급물살을 타고 알려져 관광객들의 구경거리 가게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인심좋은 웃음사이로 가끔씩 보이는 금니가 이채로운 오현환 대표가 이 곳 주인장이다. 70년대 해병대 소속으로 월남전에 참전했던 그는 72년 제대 이후 소년시절 자전거방 점원으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 가게를 차렸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곳에서 줄곧 41년간 일해 온 것. 장사가 가장 잘 되던 시기는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였다. 최근엔 중국산 자전거로 인해 가격 경쟁에서 밀려 난지 오래란다. 자전거 수리 및 판매가 그의 주요 일인데 요즘은 하루 매상이 2만원을 넘지 않는다고 너털웃음을 짓는다. 1995년엔 포스코 사원용 자전거 1000대 납품 요청에 기술자로서 경주사람으로는 유일하게 초청받아 일하기도 했다. 요즘은 판매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굳이 지인이 부탁할 경우엔 반조립된 제품을 완성시켜서 팔지만 수지가 맞질 않는다고 한다. 동네 구멍가게와 대형마트가 비교가 되지 않듯이 이 가게도 명맥만 유지한 지 오래라는 것이다. 그리고 웬만한 수리는 공짜로 해주고 기름도 쳐주고 타이어 바람도 채워주고 큰 수리라고 해도 부속값 정도만 받는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게를 고집하는 것은 친구들 때문이란다. 퇴직한 친구들의 요청으로, 모여서 술도 한 잔 나누고 시름도 덜어주는 사랑방 같은 역할을 한다며 인심좋은 웃음을 짓는다. 그는 또, 황남동 자율방범대, 새마을 지도자, 자연보호, 바르게살기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는 모범 경주시민이기도 하다. 오스트리아 철학자인 이반일리치는 인류를 구원할 세 가지로 도서관과 시와 자전거를 꼽았다. 소박하고 자족적인 삶을 은유하는 의미로서의 자전거는 언플로그드한 세상을 꿈꾸는 인간들에게는 대표적인 표상이 될 것이다. 잊혀져 갈 그 작고 허름한 자전차상회도 언젠가 사라지겠지만 자전거 페달을 밟을 두 다리가 허락되는 한 자전거는 영원할 것이다. -오태식 대표의 ‘남광 목공소’, “점심을 굶고서라도, 잠을 자지 않더라도 주문 약속은 지키지요” 오래도록 만져서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는 여러 목공기구들이 그간의 시간을 말한다. 얼마나 열심히 일 해 왔는지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의 손때 묻은 흔적은 아름답다. 황남동 오릉 가는 길에 위치한 남광 목공소(사찰문 전문, 오태식 대표, 56)에는 검지 하나가 목공 작업중 잘리고 없는 오태식 목공인이 있다. “이 일을 배운 것은 초등학교 졸업하고서부터 대략 14~5세경 이었습니다. 20대 후반, 85~6년부터 이곳에서 터를 잡고 일을 했으니 30년째죠. 단돈 450만원으로 이 목공소를 차렸습니다”고 한다. 공장이 적어서 가구 제작은 할 수 없고 업자들이 연락이 오면 손수 재와서 주로 문을 짰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전통 문 제작에 능하다고. “이 목공소를 차리고 3~4년간은 동생과 함께 일을 할 정도로 재미가 쏠쏠했지요. 공장이 적어도 일 많이 한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당시 목재를 5톤 한 차를 댔다고 하면 일을 매우 많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1년에 7차 정도 날린다는 것은 엄청났지요. 그러던것이 IMF사태 당시 그해는 절반으로 줄었고 이듬해는 다시 절반으로 줄었죠. 그리고는 5톤 한 차를 소비하는데 1년이 걸렸고요” 이에 같이 일하던 동생은 회사에 취직을 했던 것. 요즘은 그래도 일거리가 제법 들어온다고 한다. “작은 목공소가 거의 사라져버렸고 우리같은 수작업하는 목공소가 귀해졌고 게다가 한옥을 지으려는 분위기가 많아 좀 나아졌어요. 전통 한옥이나 잘 짓는 주택의 경우 문짝을 주로 제작하고 있습니다” “저는 고객과의 시간 하나만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철저하게 지킵니다.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요. 점심을 굶고서라도, 잠을 자지 않더라도 약속은 지키지요” 라고 하는 오 대표의 신용을 지키는 철칙이 오랜 단골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강동면 국당리 깊은 산 어느 작은 암자에 홍송으로 문짝을 짜 드렸는데 스님이 ‘아침에 일어나면 문짝 떼갔는지부터 먼저 확인한다’고 했습니다(웃음). 그만큼 흡족하게 문을 잘 제작했다는 뜻인거 같아 기뻤습니다” 며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앞으로도 여기에서 계속 이 일을 할 것입니다. 경로당 가더라도 걸음만 똑 바로 걷고 허리만 괜찮으면 일은 할 생각입니다. 일 해서 용돈벌이 하면 돼죠. 하하” 지금도 오 대표의 목공소 한켠에는 주문받아 이미 제작 해놓은 73짝의 문짝이 달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근데 제가 일은 확실하게 하는데 성질이 급해서 문제입니다(웃음)” 남광목공소 오태식 대표는 화끈한 경상도 남자였다. -유종태 사장의 ‘건천 대장간’, 2대에 걸쳐 65년 세월을 같은 자리에서 건천 대장간 유종태(45) 사장은 지난 2012년 본지 1055호, 우리가 간직했던…사라져가는 아름다움 ② ‘건천대장간’ 편에서 ‘삶이 심드렁해질때…‘우당탕’ 메질 소리 쏟아지는 건천 대장간을 찾아보라’라는 제목으로 취재한 바 있다. 지난 7일 다시 건천대장간을 찾았다. 4년만에 찾은 대장간은 간판이 달라져 있었다. 부친이 직접 썼다는 옛 간판은 그대로 보존한 채 포스코(POSCO)에서 제작해준 세련된 간판을 달고 있었다. 한 달 전 쯤 포스코에서 내마모강을 가져다주면서 낫이나 호미 등 농기구를 수작업으로 제작해달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이는 포스코가 사회봉사차원에서 농기구를 보급하는 차원에서 이곳 대장간에 주문을 의뢰한 것. 이 농기구 제작 과정을 SBS방송국에서 촬영해갔고 지난 31일 방송됐다고 한다. 최근 유 사장의 대장간에는 또 좋은 일이 생겼다. 회사 생활을 하던 조카가 합류한 것인데 기술을 배우라는 유 사장의 권유 덕이었다고. 유 사장은 천상 대장장이다. 뭐든지 뭉툭하고 두툼하다. 그의 어깨가 그렇고 손이 그렇고 둥그런 배도 그렇다. 손톱에 까맣게 낀 때가 그의 작업량을 말해주는 듯하다. 건천읍 건천 3리 시장 안 깊은 골목, 비린내가 진동하는 어물전을 마주하고 있는 ‘건천 대장간’은 부친(유기배, 작고)때부터 65년의 세월을 이 자리에 있었다. 값싼 중국산 농기구에 밀려 사양산업이 된지 오래된, 그저 우리들 향수를 자극하는 눈요기용 상품정도로 명맥을 유지할 것 같은 대장간을 상상했다. 그러나 ‘건천 대장간’은 달랐다. 일은 줄어들고 있긴 하지만 작업하는 대장장이가 거의 없으니 밥 먹고 살만해서 평생 생업으로 삼을 생각이라고 한다. “오시던 단골분들은 많이 돌아가셨습니다. 요즈음은 외지에서도 많이 찾아오시고 주문도 하고 물건도 사 가는 편입니다. 농기구 외에도 인테리어 소품등도 사가고요” 농기구는 갈수록 주문이 줄어들고 있지만 농기구 외에 부엌칼이나 회 뜨는 칼은 죽도시장이나 바닷가 쪽의 전문횟집에서의 수요가 만만치 않다고 한다. “대장간에서 무쇠를 연마해 칼을 만드는 작업은 흔히들 했지만 스테인레스를 다루면서 수작업으로 식도로 만드는 일은 아마도 전국에서도 드문 편으로 알고 있습니다” 면서 “동해안 지역 즉 포항 죽도시장, 구룡포, 후포, 평해 등의 횟집에서는 전부 제가 만든 칼만 사용합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인터뷰 중간에도 횟집에서 주문이 들어왔다. 또 한옥을 짓는 목수들의 연장으로서 다양한 치수의 끌이나 망치, 정 등을 주로 찾는다고. 이들은 모두 수작업으로 제작한다. 1970년~80년대는 밤새도록 일을 해도 다 해내지를 못할 정도였다. “장날 벌초 대목에는 이 대장간 앞이 ‘둘러꺼졌다’. 낫을 50가리씩 포개어 놓아도 금세 동이 났다”고 했다. “그래도 이일을 해서 먹고 사는 정도는 되니까 괜찮습니다” “작업마다 다 재밌고요”라고 말하는 유 사장은 큰 욕심부리지 않고 오늘도 우직하고 성실하게 일한다. “이 기술을 무형문화재로의 지정을 신청하라고 주위에선 많이 권하지만 제가 아직은 나이가 젊어서 더 열심히 한 뒤에 도전해 보겠습니다. 아버님이 신청을 했으나 제가 다른 곳에 있어 지정되지 못했거든요”라며 앞으로 바람을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삶이 심드렁해질때 ‘우당탕’ 메질 소리 쏟아지는 건천대장간을 찾아보라. 대장간이 전하는 치열하고 정직한 말을 듣고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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