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학창시절에 체코의 프라하에서 출생한 독일 여학생을 만난 적이 있다. 그녀는 독일의 대시인 릴케(Rainer Maria Rilke)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릴케의 고향도 그녀처럼 프라하이기에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생각해보면 그때는 이 말들이 대수롭지 않게 들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올해 경주에서는 미술인 한 분이 재조명된다. 6월 14일 경주예술의전당 대전시실에서 개막하는 전시회는 바로 그분의 탄생 110주년을 기리는 행사다. 부제 ‘어느 천재화가의 꿈’에서 천재화가는 손일봉 선생을 말한다. 손일봉은 동리나 목월처럼 널리 알려진 분은 아니지만 해방 후 한국근대미술에 미친 영향력은 여느 분 못지않다. 경주 현곡에서 출생한 손일봉은 유년시절부터 남다른 예술적 감수성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그의 천재성은 경성사범학교와 동경미술대학이라는 엘리트 코스를 밟으면서 서서히 발현되었다. 조선미술전람회와 제국미술전람회에서의 4년 연속 입선은 그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말해준다. 일본인 부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에 성공한 손일봉은 해방이 되자 고향인 경주에 돌아오게 된다. 그는 1946년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예술학교인 ‘경주예술학교’의 초대교장으로 취임한다. 경주예술학교는 당시 최고의 교수진을 갖춘 학교로, 이는 한국근대미술의 무게중심이 경주에 있었음을 반증한다. 그러나 해방 후 불안정한 정국, 전쟁으로 촉발된 이념대결의 와중에서 경주예술학교는 폐교의 아픔을 겪게 된다. 손일봉 선생은 사직 후 종군화가로 활동했고, 종전 후에는 평소 소망하던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된다. ‘호남에는 오지호, 영남에는 손일봉’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그는 중앙화단의 끊임없는 러브 콜을 받았지만 자신의 자리를 굳게 지켰다. “작가는 어느 곳에 있어도 내 그림을 그리면 된다”라는 확고한 신념 때문이었다. 그는 60을 넘은 나이에 비로소 중앙무대에 진출한다. 3년여를 수도여자사범대학(현재의 세종대학교)의 교수로 활동한 것이다. 퇴임 후 대구에 내려 온 그는 한유회(韓油會)를 조직하는 등 왕성한 창작활동에 마지막 열정을 뿜어내다가 드라마틱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생전의 손일봉에게 세잔(Paul Cezanne)은 존경의 대상이자 넘어서야 할 극복의 대상이었다. 탁월한 감각과 흉내 낼 수 없는 손일봉의 화법은 세잔을 넘어서려는 필생의 꿈을 이루고자 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자연스런 결과일지도 모른다. 해방 후 한국근대미술의 헤게모니가 경주로 이동했을 때 예술권력의 정점에서 그는 어떤 꿈을 꾸었을까? 범인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원대한 꿈이었으리라. 그는 가고 없지만 그의 꿈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사후 30년이 지난 시점에서 손일봉에 대한 재조명은 원대한 그의 꿈을 되짚어 보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간 지방화단의 거목으로 포지셔닝 되었던, 다소 과소평가된 그의 위상을 전국구 단위로 끌어올리고, 경주의 천재화가에 대한 간단없는 연구기반을 만들어 놓는데 이번 사업의 의미는 실로 크다고 할 것이다. 손일봉의 재조명은 경주시립미술관의 설립 명분을 세우는 일이기도 하다. 손일봉을 필두로 30대 요절작가 황술조, 불멸의 조각 작품 ‘해방’의 김만술, 세계적인 추상미술작가 손동진 등 솔거의 후예들과 그들의 작품은 시립미술관의 차별화된 정체성을 보장하는 매우 중요한 콘텐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 유족은 경주시립미술관의 설립을 기다리면서 고인의 작품들을 다른 곳에 기증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번 사업을 계기로 많은 경주인들이 손일봉을 근대한국의 위인으로 인식했으면 좋겠다. 특히 어린 학생들이 그랬으면 좋겠다. 이제 세계는 지구촌시대다. 우리 경주의 아이들이 성장하여 어디를 가든 우리 고장에는 손일봉이라는 위대한 작가가 있었음을 기억하고 자랑스럽게 여겼으면 좋겠다. 릴케를 자랑하던 그 옛날의 독일 여학생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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