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에게는 잘 알다시피 뿔이 있다. 종류별로 조금씩은 다르지만 사슴이나 노루 순록 고라니 등 사슴과에 속한 이들은 모두 뿔이 있다. 뿔은 사슴에게 어떤 기능을 제공하길래 여전히 붙어있는 걸까?
사슴에 뿔이 있는 이유에 대해서 어떤 동물학자도 명확히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만큼 확실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면이 많기 때문이다.
뿔의 일반적인 기능은 들소나 물소처럼 공격이나 방어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프리카의 거대한 물소떼는 머리의 뿔을 이용해 사자를 공격하는 모습도 관찰된다. 미국의 버팔로우도 비슷하다.
가까이 있는 염소나 산양도 이런 모습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들의 자위권을 위해 뿔은 유용하게 사용된다. 뿔이 육식동물보다 초식동물에 있다는 사실도 자위권과 같은 맥락에서 받아 들일 수 있다. 그러나 사슴은 예외로 보인다. 그들의 뿔은 자위권과는 멀다.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뿔이 있다면 물소나 코뿔소처럼 좀더 짧고 날카로워야 한다.
사슴의 뿔은 너무 길고 뭉툭해서 사슴이 뿔로 상대를 들이받으면 먼저 부러지는 쪽이 뿔이 아닐까 싶어지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사슴은 자신의 뿔을 실제로 그렇게 사용하지도 않는다.
뿔은 각종 무기질과 영양소를 저장하는 보관소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우리는 사슴의 뿔을 녹용이라 부르며 보약제로 애용했다. 그렇지만 사슴에게 뿔은 수컷만 있다. 뿔이 영양소의 저장고이고 그래서 살아가는데 있어 많은 장점이 있다면 암컷과 수컷은 수명이나 건강상태에 있어 현격한 차이를 보여야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지도 않다.
그렇다면 사슴의 뿔은 암컷을 유혹하기 위한 과시용일까? 사슴 중에서도 순록의 뿔은 상당히 크고 길며 그 길이만큼이나 멋있다. 분명히 사슴에게 뿔은 시각적인 면이 없지 않다. 큰 뿔을 가진 수컷은 뿔이 없는 수컷보다 무리에서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더 많은 암컷을 거느린다. 다시 말해서 암컷은 큰 뿔을 가진 수컷을 더 선호한다.
그러면 암컷은 왜 수컷이 큰 뿔을 가지는 것을 좋아할까? 사실 땅에 난 풀을 뜯어먹고 사는 사슴에게 뿔은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움보다는 오히려 폐해가 더 크다. 천적으로부터 빨리 도망쳐야 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커다란 뿔이 나뭇가지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곤란한 상황에 가끔 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속도가 생명인 그네들에게 가히 치명적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특별한 기능은 없이 단지 치명적인 단점을 가진 수컷을 암컷들은 왜 더 선호하는 걸까? 암컷들이 선호한다는 사실은 그 종 전체의 유지, 확산에 있어 단연 압도적인 요소이다. 큰 뿔을 가진 유전자가 자손에게 전해질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를 반대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생존에 아무런 필요는 커녕 오히려 해만 끼치는 커다란 뿔을 가진 수컷이 암컷들에게 더 인기있는 이유로 암컷들은 저런 좋지 않은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갈 수 있으니 그 외의 능력은 더 뛰어난 것을 아닐까? 이렇게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뿔이 크고 멋지면 그만큼 머리는 더 무거워지고, 달리기 속도는 느려질 수밖에 없으며, 균형잡기도 어려워진다. 그렇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근육은 더 발달해야하고 민첩해 질 수밖에 없으니 결과적으로 큰 뿔이 있는 것이 사슴의 생존에 오히려 더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화가 바뀌어 복이 된다는 전화위복이 바로 이를 가르키는 걸까?
인간도 비슷한 면이 없지 않다. 한때 열풍이 불었던 나쁜남자 신드롬도 같은 맥락이다. 분명히 좋지 않은 점이 눈에 보이는데도, 그것이 단점이 아니라 오히려 장점처럼 느껴져 호감으로 다가가는 이유도, 단점이 있음에도 잘 살아갈 정도니 그 밖의 더 큰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인식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확실한 점은 이성이라는 영역이 확고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있기에 실패 끝에 성공을 이루고 문명을 이루고 그 발전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는 혁신을 인간만이 쟁취해 낼 수 있었는데, 그런 인간은 사실 이성으로만 이뤄지지는 않았다.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되고 커다란 감성이라는 배경이 있다. 인간만이 아닌 다른 종들도 가지고 있고, 그러기에 교감할 수도 있는 그런 영역.
동물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것은 인간을 보다 잘 알게 되는 우회적 방법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김민섭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