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힘’, ‘시간성의 누적’이 다시 현대인들의 정서를 움직이고 있다. 아마도 쉬이 변치 않음에 대한 그리움이나 향수인 것 같다. ‘구태’와 ‘구습’을 내포하기도 하지만 ‘오래’라는 말은 참으로 친근하다. 사전적 의미로는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이 길게’다. 오래라는 말 속에는 깊은 통찰이 느껴지기도 하고 우리네 생활사적으로는 골동품점, 헌 책방 등 오래된 향기와 품격으로 와 닿는다. ‘오래’는 낡은 것이기도 하지만 시간속에서 사람과 함께 해 온 켜켜이 묵은 감동을 전하기도 하는 것이기에. 고도 경주는 오래되고 낡은 것들이 산재해있다. 그러나 ‘오래된 가게’를 찾아 취재하면서 한 곳에서 40~50년을 우직하게 장사를 한 집은 드물었다. 철거로 전문 직종들이 이동을 하는 바람에 특히나 우리지역에서는 오래된 가게들이 귀했다. 이번호에서는 인왕동 오래된 슈퍼, 옹기전 골목의 옹기가게, 문화의 거리 내 표구점, 월성동 오래된 문구점 등 4곳을 취재해 소개한다. 서민들과 세월을 함께해 온 정겨운 ‘상회’나 ‘가게’라는 이름들은 트렌드와 세련이라는 이름으로 물러난 지 오래다. 100년, 200년 된 가게와 상회들이 즐비한 ‘경주’, 절로 미소가 벙글어지지 않는가. -‘송화슈퍼’...구멍가게를 아시나요? 월성동(구 인왕동) 선덕여고 옆을 지나칠려면, 비탈진 집들 사이로 옛 기와가 초록색 어닝(차양)과 잘 어우러져있는 작은 슈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정감이 넘치는 ‘송화슈퍼(최국이 (71세))’. 사라져가고 있는 대표적 업소인 동네 구멍가게인 이곳 송화슈퍼의 오래된 진열대에는 오밀조밀 군것질 거리들과 생필품들이 가지런하다. 대형할인마트와 편의점이 늘어나면서 구멍가게는 점차 줄고 있는 추세와는 다른 이색적인 공간으로 보인다. 최국이 씨는 세를 놓은 이후 인수해 장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슈퍼는 선덕여중의 역사와 함께 한다. 1968년 선덕여중이 신축이전하자 집을 짓고 가게 문을 열었다고. “가게를 연지는 48년 정도 됩니다. 그 중 38년간은 제가 장사했지요. 내 집이니까 이곳에서 계속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장사가 가장 잘되었던 시기는 30년 전 정도인 것 같아요” 이 근처에 세 군데 슈퍼가 더 있었는데 점차 사라졌다고 한다. 최씨는 “요즘은 장사가 잘 안돼 소일거리 삼아 담배나 팔고 야간자습을 마치고 나온 학생들에게 군것질 거리나 팔고 있어요. 예전에는 오뎅 삶고 떡볶이, 라면, 계란도 삶아 놓기 바빴어요. 그 외에도 학생들 스타킹부터 아이들이 필요한 물품들이 다 구비돼 있었고요. 요즘은 학교 구내식당과 매점이 있어 영 시원찮지요. 맞은편 골목에 살던 동네 주민들도 철거로 인해 이 동네를 다 떠나고 없는 상태입니다”고 했다. “아침 5시 반이나 6시에 문을 열어 밤 11시까지 엽니다. 연중 휴일 없이 일을 했지만 요즘은 아주 가끔씩은 문을 닫기도 하지요. 아무래도 봄철과 여름철에 장사가 잘 되는 편이고요” 원래 이 집 간판은 ‘송화상회’였는데 3년 전 ‘송화슈퍼’로 개명된 간판이 걸려 있다. 옛 간판이 소실돼 운치가 다소 덜해 안타까웠지만 가끔씩은 내외국인들이 사진을 찍기도 한다는 송화슈퍼. 아직도 우리 지척에는 이런 가게들이 남아있다. -2대째 운영하고 있는 옹기전, “며느리가 원한다면 물려줄 생각입니다” 일명 ‘옹기전 골목’에는 2대에 걸쳐 이용호 대표(71), 김둘임(66)부부가 운영하는 50년 된 옹기전이 있다. 1950년대 이 골목에는 옹기전이 4군데였다. 지금은 이곳을 포함해 두 군데가 명맥을 잇고 있을 뿐 김 대표의 옹기전은 1963년부터 이 대표의 어머니가 일을 시작했고 7남매가 이 장사로 공부를 하고 결혼을 했다고 한다. 당시는 고추장, 된장, 김장 등을 집에서 담궈먹던 시절이라 수요가 많았다. 이 대표는 “유리 계통 외에는 ‘툭사바리’, 추어탕 그릇, 화분 등을 여기서 다 사갔을 정도였지요. 어머니가 연로하시고 제가 80년대 경주로 귀향했고 아내가 어머니를 도와 일하다가 88년 아내가 맡아 지금까지 해왔습니다”고 했다. “우리집에서 자랑으로 삼는 것은 50년 넘은 시간도 시간이지만, 경기도 이천, 울산 옹기굴 남창 등에서 제대로 된 물건을 전량 사와서 팔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이나 베트남 제품은 팔지 않습니다” 60년대는 불국사, 현곡, 산내 등 줄가마 옹기굴들이 여럿 있을 정도로 가장 수요가 많았다. 수요가 줄어들면서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70년대까지는 타작이 있어도 한 가마를 통째로 사서 가져와 팔았다. 지금은 필요한 종류와 양만큼 주문해서 가져다 팔고 있고 김칫독, 쌀독, 생수통 등이 잘 팔린다고 한다. “지금은 아내가 소일거리 삼아 장사하고 있지만 며느리가 나이가 들어 원한다면 물려줄 생각입니다” -살아있네!! ...월성초등학교 앞 베테랑 ‘삼우 문구점’ 문구점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문구점을 지나만 가도 가슴이 설렜던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월성 초등학교 맞은편에는 오래된 추억의 문구점이 있다. 바로 경주지역 초등학교 문구점 중에서 가장 오래된 문구점인 ‘삼우 문구점(신철수(56))’이다. 이 건물을 짓기 전 1968년 신 대표의 누나가 맞은편에서 삼우 문구일을 시작했고 10대때 누나에게서 이 일을 배웠다는 신 대표가 이곳에서 일 한지는 41년째다. “70~90년대까지는 장사가 잘됐습니다. 추석과 설날에 용돈을 두둑히 받은 아이들이 문구점에 와서 ‘쇼핑’을 한 것이죠(웃음). 폭죽이나 장난감 등이 대부분이었고요. 2002년 월드컵 개최 이후부터 서서히 덜 팔렸지요. 월성초 학생수가 줄고 대형매장에서 완구, 문구 코너가 다 있어서 구매를 쉽게 해서인 것 같아요” ‘15년 전 미니카 30% 할인’ 이라는 문구가 인상적이었다. 미니카 열풍이 불었고 엄청나게 팔려 나간 이후 팔고 있는데 20대 후반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한다. 이곳 역시 시에서 교체한 간판을 새로 달고 있었다. 예전엔 벽에 글씨를 쓴 현판식 간판이었다고. 여느 학교 근처 문구점보다는 아직도 상품이 많은 편이어선지 인터뷰 중에도 길을 가던 손님들이 계속 들렀다. 지금도 옛 과자들이 그대로 나오는 것도 있지만 예전에는 찹쌀모찌, 도넛, 오뎅, 꽈배기 등은 시장에서 떼와서 팔았다고 한다. “우리는 전체적으로 싸게 팔고 있습니다. 이런 문구점들은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인건비도 나오기 어렵기 때문이지요” 예전 이 거리에는 이곳을 포함해 네 군데 문구점이 있었다. 70년대 후반에는 내남, 건천, 아화 등에서 문구류를 사러 왔다고. 초등학생들에게는 중심가였던 것. “지금도 옛날 자주 들르던 학생들은 어른이 돼도 알아봅니다” -표구 명가...문화의 거리 내 노서동 ‘삼선방 표구사’ ‘삼선방 표구사’ 정재욱(58) 대표는 1970년대 초 대구에 있는 표구사에서 정통표구 기술을 익힌 뒤 22세때 5~6년째 운영되고 있던 경주 삼선방으로 와 37년째 같은 장소인 이곳에서 훼손된 서화류를 복원시키고, 의뢰인의 작품을 정성껏 표구하는 등 정성과 신용으로 외길을 걸어왔다. 이로써 이곳, 삼선방의 내력은 42~43년이 되는 것이다. 문화재급 화첩이나 서첩, 탱화 영정 등의 복원 일도 해 온 정 대표 부부가 작업을 하느라 여념이 없는 삼선방에 최근 낭보가 날아왔다. 지난달 경북도에서는 최초이자 유일하게 표구문화재수리기능자 자격증을 획득한 것. 정 대표가 경주에 왔을 당시, 경주전역엔 20여 곳의 표구사가 있었다고. 이 곳 일대만 해도 ‘대왕’, ‘조아’, ‘태양’ 등 5군데가 있었고 지금은 3군데가 명맥을 잇고 있다. 현재 지역에는 10여 곳 정도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가장 제작주문 의뢰가 많았을때는 80년대 중반이었다고 한다. 정 대표의 표구점은 일본적산가옥이라 더욱 시간성을 배가시켜 고졸한 아름다움을 더한다. 100년 정도 된 집으로 추정하며 건축전문가들도 많이 다녀가는 집인 것. 정 대표는 “4년 전 이 집을 드디어 샀습니다. 확장하는 공사 중 천정을 수리 하는 과정에서 일본식 천정의 대들보가 나타나 그대로 천정을 드러냈지요” “이 집 주인인 최병태 전 교장선생님이 30년간을 세를 올리지 않으셔서 이 곳에서 더욱 오래 일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집을 샀을때 눈물이 날 정도로 감사한 분이었지요”라고 했다. 올곧은 장인 정신을 가지고 작업해 온 땀방울의 결실이었을까. 정 대표 부부는 이 가게에서 두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냈다. 세종시 문체부에서 공무원인 큰 아들은 전국 수석에 빛난다. “표구일도 정통으로 배운 이들이 있고 어깨 너머로 배운 이들도 있어서 표구대 차이와 기술 차이도 많이 납니다. 이는 작가나 소비자들이 먼저 알고 있지요” “세상 이재에 밝았다면 이곳을 떠났겠지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이 골목을 지키면서 앞으로도 큰 욕심없이 그간 쌓은 기술로 열심히 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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