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장군묘에 이르는 길에는 녹색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오풍십우(五風十雨)라는 말이 있다. ‘닷새에 한 번씩 바람이 불고, 열흘에 한 번씩 내리는 비’라는 뜻으로, 날씨가 순조로움을 의미한다. 올 봄에는 가끔 바람이 심한 날도 있었으나 대체로 오풍십우가 되풀이 되고 있어 호시절이라 할만하다.
서천교를 건너 흥무로를 거쳐 일방통행로인 김유신묘에 이르는 길 주위로는 온통 녹음이다. 녹색은 봄의 색이다. 녹색은 생명·싱싱함을 상징한다. 영국인은 기분 상쾌할 때 ‘녹색 안에 있다(in the green)’고 하며, 신선한 고기를 녹색 고기(green meet), 공장에서 막 나온 새 기계를 그린머신(green machine), 오래되었지만 언제나 신선한 노래는 에버그린(ever green)이다. 독일에서는 다시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 때 ‘내 심장이 녹색을 띤다’고 한다.
-김유신장군묘인가, 흥무왕릉인가?
삼국통일의 명장 김유신장군의 묘는 사적 제21호로 문화재청에는 김유신묘로 등록되어 있는데 김해 김씨 문중에서는 흥무왕릉이라고 한다.
김유신장군묘는 충효동 송화산 줄기가 동쪽으로 뻗은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둘레에 호석을 두르고 호석 사이에 십이지신상을 배치하고 여러 개의 돌기둥으로 난간을 만들었다.
장군의 죽음과 관련하여 『삼국사기』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유신이 사제(私第)의 내실에서 죽으니 79세였다. 왕은 부음을 듣고 애통해 하며 채백 1000필과 벼 2000섬을 보내어 상사(喪事)에 쓰게 했다. 그리고 고취수 100명을 주어 금산벌에 나가 장사지내게 하고 유사를 시켜 비를 세워 공명을 기록하게 하였다. 뒤에 제42대 흥덕왕이 공을 봉하여 흥무대왕이라 하였다.
하지만 『삼국유사』에서는 위 기록과는 달리 제54대 경명왕 때에 공을 추봉하여 흥무대왕이라 하고 능은 서산 모지사의 북쪽 동으로 뻗은 봉우리 위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봉분은 둥근 모양으로 지름이 30m에 달한다. 둘레에는 병풍처럼 판석으로 호석을 두르고 호석 중간에는 12지신상을 배치하였다. 호석 밖에는 여러 개의 돌기둥을 세워 난간을 만들었다. 호석과 난간 사이 바닥에는 돌을 갈았다.
1973년 5월 봉분에서 북북서쪽 16m 거리 땅속에서 납석으로 만든 해상(亥像, 돼지상) 하나가 발견되었다. 이 상의 발견으로 인하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1974년 김유신묘 주위의 발굴조사와 석조물 복원을 위한 실측조사를 하였다. 그때 정동(正東)의 땅속에서 묘상(卯像, 토끼상)의 파편을 수습하였다. 다른 방위에도 십이지신상이 묻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다. 서쪽 묘역에서는 산신제를 지내는 제단 같은 장방형 판석도 묻혀 있었으며 혼유석이 있었던 자리도 찾아내어 이를 복원하였으며 없어진 난간석도 복원하였다.
묘의 양 옆에는 신도비가 서 있는데, 서편은 ‘김유신묘’, 동편은 ‘흥무왕릉’으로 되어 있다. 이 비는 묘를 조성할 당시의 것이 아니다. 서편에는 1710년 경주부윤이 세운 ‘신라태대각간김유신묘(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 동편에는 1934년에 세운 ‘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릉(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 비이다. 그런데 동편 비의 마지막 글자 ‘陵’은 비가 오거나 물을 뿌리면 ‘墓’라는 글자로 바뀐다. ‘墓’라고 새겼다가 후에 ‘陵’으로 고친 듯하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일부 사람들이 가끔 소형 분무기로 물을 뿌려 비의 손상이 우려된다.
또 ‘태대각간’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신라 비편이 1974년 교동 천관사지 동편에서 출토되었는데 이를 황수영 박사가 고물상으로부터 구입하였다고 한다. 김유신 장군의 공적을 기록한 비편으로 추정되나 확실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