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良志)스님은 그의 조상이 누구이며 고향이 어디인지 또 그의 작품은 무엇이며 그 작품의 경향은 어떠한지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어떤 이는 알려진 그의 작품으로 미루어 서역에서 왔거나 당나라에서 귀화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또 이곳 석장사지에서 발굴된 탑상문전에 표현된 불상의 모습이 석가모니 고행상과 유사하다고 해서 스님이 인도 순례를 한 적이 있을 것으로 짐작하기도 하지만 스님이 신라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더 많다.
-발굴 당시의 석장사지
1986년과 1992년 두 차례에 걸쳐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박물관 팀의 발굴에 의해 불상과 탑을 조각한 190여 점의 벽돌이 수습되었다. 이 조사에 의해 석장사의 사역과 규모 등이 확인되었다.
벽돌에 돋을새김한 불상과 탑들은 사천왕사지에서 출토된, 양지의 작품으로 알려진 *녹유사천왕상전(綠釉四天王像塼)의 신장상 표현기법과 그 양식이 비슷하다. 또 이 벽돌에는 ‘제법종연기 여래설시인 피법인연진 시대사문설(諸法從緣起 如來說是認 彼法因緣盡 是大沙門說)’이라는 연기법송(緣起法頌) 20자가 새겨져 있는데 양지스님의 글씨로 추정된다.
이는 석장사 창건과 비슷한 시기 당나라의 고승 의정이 인도를 여행하고 쓴 기행문인『남해기귀내법전(南海奇歸內法典)』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통해 당시 불교의 제반 상황과 사찰에서의 생활 등을 아는 데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외에도 금동불상 5점, 불교미술 작품이 새겨져 있는 조소 파편 20점, 금강역사상 5점이 발굴되었으며, 석장사임을 밝혀 주는 ‘錫杖’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조선시대 자기(瓷器)가 발견됨으로써 석장사가 신라 선덕여왕 때부터 조선 후기까지 존속하였음이 밝혀졌다.
이곳에서 발굴된 탑상문전(塔像紋塼)은 전탑(塼塔)에 사용되는 벽돌에 탑과 불상을 새긴 문양전을 말한다. 양지 스님은 전돌 제작에 7가지 이상의 틀을 만들어 기와를 찍듯 찍어서 만들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표현방식의 특이함뿐만 아니라, 독특한 불상도 눈에 뜨인다. 연화좌(蓮華坐)가 생략된 채 가슴 안쪽에 갈비뼈를 3단으로 새긴 불상은 우리나라의 고대 불교조각 가운데 유일한 부처님의 고행상(苦行像)이다. 석가모니가 아직 깨달음을 얻기 전에 모습을 표현한 고행상은 인도에서 많이 발견되지만,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양지가 만든 것이 유일하다.
이곳에서 수습된 것 이외에도 분황사 모전석탑의 금강역사상, 감은사 사리기, 문무왕의 화장지로 추정되는 능지탑의 소조 좌상 등도 일부에서는 스님의 작품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는 한국 미술사상 가장 훌륭한 조각가, 또 존경받는 예술가임에 틀림없다. 지금 극락에서 자신을 미켈란젤로에 비견되는 것에 대해 섭섭해 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이 녹유전에 표현된 상이 사천왕상이 아니고 팔부중상이라는 학자도 있다. 사천왕사에서 발굴된 상이니 사천왕상이라고 하나 실제 지금까지 출토된 것 중에 다문천왕상으로 볼 수 있는 상이 없다. 『삼국유사』 「의해편」 ‘양지사석’조에서 ‘천왕사 탑 밑 8부중상’을 양지스님이 만들었다는 구절이 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