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良志)스님은 신라의 미켈란젤로였다.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회화·조각·건축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 피렌체 아카데미아 국립 미술관의 다비드,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화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미켈란젤로의 이 작품들을 현장에서 감상할 수 있었지만 가장 잊을 수 없었던 것은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화인 ‘천지창조’였다. 인산인해를 이루는 군중들 속에서 고개를 젖힌 채 그림에 몰두하던 일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다. “천재를 믿지 않는 사람, 혹은 천재란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미켈란젤로를 보라.” 미켈란젤로의 전기에서 로맹 롤랑이 한 말이다. 현장에서 이 작품들을 감상한 후 그의 말이 과장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이 사람이 7세기 신라의 양지스님을 알고 있었다면 그 말이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미켈란젤로가 아닌 양지(良志) 스님을 보라’고. 석장사지에서 출토된 탑상문전(塔像紋塼)에는 두 분의 부처님과 그 사이에 탑을 표현하였다. 『삼국유사에』 ‘일찍이 벽돌을 다듬어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삼천불상을 만들어 그 탑 안에 모시어 절 안에 두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와 같은 벽돌 1500장으로 전탑을 쌓으면 탑 안에 삼천불상을 모신 셈이 된다. 양지스님은 선덕여왕 재위 시부터 문무왕 때까지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조각·공예·서예 등 다방면에 걸쳐 재능을 발휘한 뛰어난 예술가이자 고승(高僧)이었다. 『삼국유사』 「의해」편 ‘양지사석’조에는 그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양지스님이 석장(錫杖) 끝에 포대 하나를 걸어 놓으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 시주(施主)의 집으로 날아가서 흔들리면서 소리를 내었다. 그러면 그 집에서 이를 알고 재(齋)에 쓸 비용을 여기에 넣는데, 포대가 차면 날아서 되돌아왔다. 그래서 그가 주석하던 절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했다. 이외에도 그의 신기한 행적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여러 가지 기예에 두루 능통하고 그 신묘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 또 그림과 조각, 글씨에도 능하여 영묘사의 장육삼존상과 사천왕상, 사천왕사 탑 아래의 팔부신장 그리고 법림사의 주불삼존과 좌우 금강역사상 등은 모두 그가 만든 것이었다. 또 영묘사와 법림사의 현판도 그가 썼으며, 일찍이 벽돌을 다듬어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삼천불을 조각해 그 탑 안에 안치한 후 절 안에 모셔 두고 예를 올렸다. 그가 영묘사의 장육상을 만들 때에는 스스로 선정(禪定)에 들어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뵌 부처님의 형상을 만들었다. 그가 불사(佛事)를 할 때에는 성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나르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오라 오라 오라 오라 슬픈이여 서러운 중생들이여 공덕 닦으려거들랑 오시라 이 노래는 불상을 조성하는 공덕을 노래한 것이지만 특히 양지스님이 하시는 이 일에 대해 당시 사람들의 무한한 신뢰를 표현한 것이다. 이후 서라벌 사람들이 방아를 찧을 때나 다른 일을 할 때에는 모두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다음호에 계속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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