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100년 넘은 초등학교는 계림초와 옥산초, 양동초 세 곳이다. 이번호에서는 그 두 번째 학교로 안강읍에 있는 옥산초등학교를 다녀왔다. 개교100주년 기념비와 사립옥산학교에서 이식해 와 ‘옥계국민학교’와 역사가 같다는 100년 수령의 향나무는 ‘옥산’의 저력을 상징하고 있었다. 아직도 회재 선생의 책 읽는 소리가 들리는듯한 유서깊은 옥산초등학교는 유학이 근대정신을 획득해 가는 과정에서 옥산서원 유림들의 중지와 노력으로 설립된 학교다. 회재 이언적 선생의 13세손 이병유 선생의 주선으로 교육구국의 이념아래 설립돼 몇 차례 교명 변경과 인근 소규모 학교를 통합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영욕의 세월을 이겨내고 올해 개교 109년을 맞이한 것. 이 학교도 한때는 많은 학생들이 수업하는 학교였으나 이촌향도의 현상은 이곳도 피할 수가 없다고 한다. 운동장 가득한 학생들이 해마다 그 수가 줄어들면서 지금은 작은 규모의 시골학교지만 한 세기의 전통을 바탕으로 그 어느 학교보다 알찬 교육을 펼치고 있는 학교다. 교번 19번지 안강들 서북끝자락에 위치한 이 학교 주위에는 옥산서원을 비롯해 국보 40호 정혜사지13층석탑 등 문화유산이 산재해있고 자옥산, 도덕산, 무학산이 둘러싸고 있어 그 정기가 서린 곳이다. 어린이들 인성교육의 장으로 안성맞춤의 환경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봉문 교장은 이러한 전통과 문화역사적환경을 바탕으로 학부모, 교사, 지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적극적인 참여로 꿈과 희망을 노래하는 옥산초등학교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 기사는 이봉문 교장의 인터뷰와 자료제공, 2008년 옥산초등학교 동창회가 발간한 ‘옥산초등학교 100년사(1907~2007)’를 바탕으로 구성됐다. -안강 소재지에도 없었던 옥산학교, 안강은 물론, 영천과 기계에서도 배움에 목말라하는 젊은이들 유학 이어져 경북지방 사립학교 중 서원을 배경으로 해 유림이 주체가 돼 설립한 대표적 서원 학교가 옥산서원을 모태로 하는 옥산학교다. 설립의 근거자료는 독락당이 보관한 ‘임파정기’에 잘 나타나있다. 개교 이듬해 교직원의 임용 사항에 대한 기록으로 보인다. 당시 안강 소재지에도 없는 학교를 이곳에 세웠으니 안강은 물론, 인근 영천과 기계에서도 배움에 목말라하는 젊은이들의 유학이 이어졌다고 한다. 학교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고 옥산인의 자긍심 또한 컸다고. 위기에 처한 시기는 특히, 한국 전쟁 당시였다. 치열했던 안강전투때 당시, 김병희 교사는 학교 문서 유실을 우려해 자신의 집에 문서를 보관했는데 오히려 더 큰 화를 입고 마는 결과를 초래한다. 학교는 폭격으로 한 칸이 소실됐으나 김 교사의 집은 완전 소실돼 아까운 학교의 자료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비운을 맞이한 것. 동문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때는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위해 싸웠고 산업화시기에는 산업역군으로서 조국 근대화에 앞장서 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국독립을 위해 투쟁하거나 포항 안강전투에서 공적을 쌓았다. -회재 선생 13세손 이병유 선생 주선으로 교육구국의 이념아래 설립돼, 1962년에는 874명으로 가장 많은 학생 기록 1895년 경주부가 경주군으로 개칭되면서 여주 이씨 회재 이언적 선생의 13세손 이병유 선생은 옥산서원이 현대적인 학교로서의 운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이에 이병유 선생 소유인 경주군 강서면 옥산리 1550번지에 와가 3동, 초가 1동을 건립해 4년제 사립 옥산학교(4년제)를 건립해 1907년 10월 첫 개교를 한다. 1907년 4월 가장 먼저 공립경주보통학교(계림학교)가 설립된 데 이어 그 해 10월 두 번째로 사립 옥산학교가 설립된 것이다. 개교 당시, 설립자 이병유 선생과 초대 이기호 교장이 운영하던 중 상당한 자금이 필요해 1908년 21명이 뜻을 모아 기름진 논 등으로 재원을 확보하고 옥산학교로 인가받아 공동으로 운영했다. 1911년 9월 작성된 문건을 참고해보면 이미 전교 학생수가 50명이 넘어 해가 갈수록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1923년 6년제로 개편되었으며 1944년 경주옥산공립학교로 인가를 받은 뒤, 1949년 경주군 강서면이 안강읍으로 승격되고 그 해 5월 경주군 안강읍 옥산리 1116번지 현 위치에 이전하면서 옥산국민학교와 하계국민학교가 옥계국민학교로 병합 인가됐다. 1963년 옥산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1981년 병설유치원을 개원했다. 1996년 옥산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 2000년 하강분교장을 옥산초등으로 통합했다. 2007년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이 기념행사를 통해 개교 100주년 기념비를 제막하는 등 학생, 교사, 학부모, 지역 주민, 동창회가 한데 어우러져 옥산인으로서 자긍심을 높이고 학교 교육 발전을 도모한다. 100년의 역사는 사립 40년과 옥산초등 60년을 합친 것이다. 2009년 교원능력개발평가 선도(도지정 시범)학교로 지정됐다. 2013년 현재의 이봉문 교장이 취임했다. 교훈은 ‘충효’로서 교목은 향나무이고, 교화는 목련이다. 향나무는 굳은 의지를, 목련은 아름다운 성장을 의미한다. 현재 6학급, 유치원 1학급이 편성돼 있으며 80명의 전교생이 다니고 있다. 1954년 481명, 1962년에는 874명으로 가장 많은 학생을 기록한다. 1986년 200명선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1994년 112명, 1995년 84명으로 줄어들어 현재 80명과 비슷해진다. 안타깝게도 옥산학교의 학적을 비롯한 문서 일체 등의 모든 자료가 한국 전쟁으로 인해 유실돼 졸업 과정의 기록이 없다. 1950년 옥계국민학교 제1회 졸업을 시작으로 정확한 졸업생 수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2016년 11명이 졸업했으며 현재까지 365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옥산 졸업생들은 저마다 지역사회와 나라의 동량으로 발전에 초석이 되는 훌륭한 인재로 성장했으며 학교의 부지 확장과 정지 사업, 장학금, 도서실 설치 등 학교 발전에 끊임없는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우거진 산길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15리 먼 길을 책보자기 등에 메고 달음박질하며 학교 가던 길” 1970년 12월부터 시작된 새마을 운동은 지역사회 뿐만 아니라 학교 교육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옥산에도 학부모 및 주민들이 참여하는 학교 가꾸기 사업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학부모 270명이 1일씩 2년간 부역했다는 기록이 전할 정도다. 1980년에는 학교 부지 북동편 약 300평(평당 4000원)과 1평 돕기 운동을 펼쳐 279평(1평 이하 56건)을 모금을 통해 매입했다고 한다. 학교 가꾸기 모습을 당시 안강읍 행정을 책임지고 있었던 27회 강덕윤 졸업생은 이렇게 회고했다. “학교 진입 도로가 ‘기역’자로 돼 있어서 학교 발전은 물론, 등하교시에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직선으로 고치기로 하고 지주를 찾아가 설득해 부지를 희사할 것을 승낙 받았다. 이렇게 되자 마을 사람들이 자기 일처럼 몰려 나와 지게로 흙을 져다 붓고 손수레로 흙을 운반하고 땀 흘리며 진입로를 직선으로 만들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고 했다. 이찬영(옥산 11회) 동문은 “ 자랑스럽게도 이 학교를 다니면서 형설의 공을 쌓았다. 마을 앞 오솔길 굽이굽이 돌아 눈 밑으로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저수지, 소나무와 우거진 산길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15리 먼 길을 책보자기 등에 메고 달음박질하며 학교 가던 길. 그래도 6년간 하루도 결석하지 않고 다녔던 모교! 겨울 문턱이면 난로에 불 피우기 위해 솔방울 따러 산길을 헤매던 일, 난로불에 도시락 위 아래 놓고 서로 다투기도 했지만. 새까맣게 그을린 도시락 그리고 다 타버린 깜둥 보리밥!”으로 당시 학창시절을 되돌아봤다. 이지만 (옥산 46회, 전 경북교육청 관리국장)동문은 “ 학교 대표 선수로 보람과 긍지를 느끼며 활동하던 터치볼 대회와 육상대회서 흐뭇하고 마음 조이던 순간들. 시험 기간에 촛불아래 옹기종기 서로의 예상 문제를 풀어보기도 하고 머언 훗날 푸른 꿈을 위한 진리 탐구에도 매진해 보았지..., 공직 생활 38년 대과없이 정년을 하게 된 원동력도 모교에서의 기본 교육이 튼튼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회고했다. -“‘오직 공부’라는 인식 지양하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행복할 수 있는 프로그램에 주력” 교육은 바로 ‘꿈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이봉문 교장은 “올해 15명의 신입생이 입학해 시골 학교로서는 많은 편에 속한다. 조금씩이라도 입학생이 늘고 있는 것은 ‘오직 공부’라는 인식을 지양하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행복할 수 있는 대안학교적인 프로그램과 정책을 세워 그런것 같다”며 무엇보다 인성교육에 매진하는 것을 학부모들이 인정하는 것 같아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이 교장은 성적으로 한 줄 세우기보다는 각자 삶의 주체가 될 수 있는 학교 만들기에 주력하고 있다. ‘꿈과 희망을 노래하는 행복학교’를 지표로 삼고 옥산교육공동체 하나 되기, 인성을 갖춘 창의적인 인재 기르기, 미래를 대비한 교육환경 조성하기, 글로벌 인재육성을 위한 옥산의 세계화 교육 등을 옥산교육의 로드 맵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 “제가 부임하면서 가장 큰 숙원 사업이 체육관 건립이었다. 최병준 도의원이 발벗고 나서 경북도 예산을 확보해 현재 짓고 있으며 오는 6월 중순경 준공 예정이다. 또, 1984년 이후 발간된 교지가 지금까지 매년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발간되고 있는 것도 자랑거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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