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은 한 송이 붉게 핀 복숭아꽃이었다. 세상의 풍랑은 거칠고 사나웠으나 임은 한 시대의 한을 온몸으로 감싸 안은 채 고결한 삶을 잃지 않았다’
금장대 그림과도 같이 아름다운 풍광아래 고졸한 명문(名文)을 새긴 ‘동도명기 홍도 최계옥’ 추모비가 제막됐다. 이 추모비는 조선시대 정조로부터 ‘홍도’라는 별호를 받은 기생 홍도 최계옥의 생애를 기록한 것으로, (사)한국예총 경주지부를 비롯한 경주의 문화예술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지난 16일, 금장대 소공원에서 제막돼 임의 넋을 위로하고 시민과 함께 기념하게 된 것.
‘홍도야 우지마라’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한 동도명기 홍도 최계옥(1778~1822년)은 음악과 시문 등에 뛰어난 천재예술인으로 후학 양성에도 전념한 인물이다. 최계옥은 죽은 뒤 경주시 도지동 산 18-7번지 일대에 안장됐다. 그 후 30년이 지나고 철종 2년 경주의 풍류객과 교방의 악공, 기생들이 묘비를 건립해 묘지를 관리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경주지역 예술인들이 홍도의 묘를 관리했지만 묘역 일대가 아파트 부지에 편입되면서 묘비는 사라지고 분묘는 무연고분묘로 처리돼 2005년 납골당에 안치됐다. 납골당 안치기간인 10년이 지나서는 사단법인 신라문화진흥원이 장례절차에 따라 유연고 납골로 이관해 경주시 건천읍의 영호공원에 그를 안치했다가 경주 문화예술인들이 ‘동도명기 홍도기념사업회’를 설립해 추모비 제막을 추진했다.
추모비에는 ‘임의 본명은 최계옥이며 홍도는 정조대왕이 내린 별호이다. 아버지는 최명동이고 어머니는 경주 관기 출신이다. 재주와 미모가 빼어난 임은 십여 세에 시를 외며 음악을 깨쳤고 스무살에 궁궐 상의원에 들어가 독보적인 노래와 춤으로 명성을 떨쳤다’ ‘임은 정조대왕의 장인 박준원의 외부(外婦)가 되어 십여 년 같이 살았고 그가 죽은 뒤 경주에 내려와 악부(樂府)의 사종(師宗)으로서 후진을 양성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병이 깊어졌을때 임은 모든 재산을 이웃에 나눠주고 죽으니 마흔 다섯 살이었다’고 명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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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추모비는 조철제 선생이 비문을 짓고 외동 석재가 기증한 비석에 정수암 선생의 글씨를 새겼다.
동도 홍도 총괄 기념사업을 맡아 추모비 제막을 추진한 경주예총 최용석 회장과 신라문화진흥원 김호상 원장은 “탁월한 예술적 재능을 경주에서 발휘하고 후학양성에 정열을 바친 것을 기리고자 2014년 말부터 이 사업을 추진해왔다. 김동리 선생의 무녀도의 배경이었으며 예기청소라 전해져 오는 이곳 금장대에 비를 세워 시민들과의 접근성도 고려했다. 자연풍광도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문학과 예술의 상징으로서의 장소성에 의미를 부여했다” 면서 “최계옥 선생의 혈손은 없지만 경주의 예인들과 함께 영원토록 호흡할 수 있게 돼 기쁘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