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솔거미술관은 첫 공립미술관으로 지난해 박대성 화백(72)의 개관전을 성황리에 마친 바 있다. 솔거미술관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 올린 혁혁한 공을 세운 대전시였다. 2016년 다시, 소산 박대성 화백 등단 50년 기념 특별전 ‘率居墨香(솔거묵향) 먹향기와 더불어 살다’전의 개막을 맞이했다. 박 화백의 후속작과 이번 전시에 대한 관람자들의 기대치는 높다. 전시를 앞두고 막중한 부담이 있을 수 밖에 없는 화백을 만나 화업 50년을 돌아보며 데뷔 당시의 회고담과 근황에 대해 들었다. 많은 이들의 보이지 않는 도움과 정신적 후원 없이는 오늘의 자신이 없었을거라며 몸을 낮추는 박 화백은 다소 야위었으나 기상은 더욱 맑아 보였다. 오롯하게 작업에만 전념하고 있는 화백에게서는 경외감을 느낄 정도였다. 화업 50년의 정수를 뽑아내고 있는 선생에 대한 ‘붓 한 자루로 세계를 희롱할 수 있는 경지’, ‘묵필의 오묘한 경지는 마치 구도 행각과 다름없다’는 표현은 적절했다. 평정심을 유지하며 작업을 향한 구도적 자세는 그가 칩거하고 있는 남산의 기개와 여전히 함께였다. ‘어떤 젊은이가 독학으로 입선했느냐’... 리어커에 작품 싣고 출품하러 가기도 정작, 화백은 50주년임을 미처 알지 못했다며 데뷔 당시를 회상했다. “60년 후반 대구에 있던 시절이었는데 비천함을 면치 못하던 시골 화가였다. 동아대학교 국제미술 콘테스트에 응모할 당시는, 응모해 본적이 없었고 호수 개념이 없어서 문짝만한 그림 두 세 장으로 응모했다. 여름 풍경 그림이었는데 리어커에 작품을 싣고 출품하러 간 기억이 있다. 입선을 했고 주경 선생, 배명학 선생, 죽농 선생 등의 유명 화가들이 ‘어떤 젊은이가 독학으로 입선했느냐’며 대구에 있는 나를 직접 찾아 와 무척 감동스러웠다. 아마도 이것이 본격적인 화업의 첫 출발이었던 것 같다” 화백은 이듬해 국전에도 대작으로 응모했다. 역시 리어커에 실어 출품했고 입선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69년 일이었다. 문중에서는 ‘과거 급제’를 했다며 잔치를 열어 주었다. 나중에서야 국전에서 동양화 부문 입선은 처음이었음을 알게 됐다며 당시의 기쁨을 전했다. 기존 동양화와는 전혀 다른 수작, ‘화단의 대혁명’이라는 평 얻어 절필의 위기는 없었냐는 질문은 ‘한 번도 그런적이 없었다’고 잘라 답하면서 우문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고비는 있었다고. 국전 첫 입선 이후 연속 8회 입선을 했는데 여섯번째부터는 특선 물망에 오르고는 낙선하곤 했다. 당시 학연 지연이 만연한 탓이었을까. 독학한 배경이 전부였던 선생이 그림하나로 도전하기엔 역부족이었던 것 같았다며 당시 붓을 꺾고 싶었을 정도로 심적 고통이 컸다고 했다. “제자가 특선을 할 정도였다. 그때 이종우 화백과 구상 선생 등은 나의 후견인과 같았다. 74년, 그 분들이 대만고궁박물관에서 수학할 수 있도록 유학길을 마련해주었다. 유학에서 공부한 것이 오늘날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됐다” 중국 전통의 좋은 작품을 많이 접하다보니 그간 공부하고 있던 것이 무용지물이었음을 깨달으면서 스스로에게 회의가 왔고 그것은 지금까지의 화풍을 전복시킬 만한 가장 큰 수확이었다고 했다. “다시 첫 출발점에 서서, 실제 보고 그리는 실경을 추구하게 됐다. 이것이 실경산수를 가장 생명력있게 그리게 된 배경이 됐다” 대만서 돌아와 75년 대구매일신문사 화랑 개관전을 장식했으나 국전에는 2년 연속 낙선의 고배를 맛본다. 이에 대구시의 후원을 뒤로 하고 서울중앙화단으로 올라가 당시 국전을 능가하는 중앙미술대전 1회에 대상없는 장려상을, 2회에 대상을 거머쥐게 된다. 그때 생의 환희를 느낄 정도로 기뻤다는 박 화백은 기존 동양화와는 전혀 다른 수작이라는 찬사를 받았음은 물론, ‘화단의 대혁명’이라는 평을 얻었던 것. “제대로 된 군인이라면 전쟁터에서 쓰러져야하지 않겠는가” “이번 전시에 거는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부담감은 분명히 있다. 솔거미술관 첫 개관전 이후 기간이 몇 개월 밖에 되지 않아 작업에만 몰두했다” “이제는 화폭에서 여유를 가지고 싶다. 느긋하게 즐길수 있는, 한참을 봐야 스며나오는 휴머니티라고 할까. 더욱 깊어진 울림을 전달하고 싶다. 이전까지의 파워풀하고 장쾌한 그림에서 아련하게 우러나오는 한국화의 정수를 표현해보고 싶었다” 평생 한번도 작업이 싫었던 적이 없다는 화백은 종신토록 작업에만 전념하겠다고 천명한다. “참 멀리 왔다. 제대로 된 군인이라면 전쟁터에서 쓰러져야하지 않겠는가. 안락하게 후방에서 머물면 안되잖는가. 그것이 가장 행복한 마감 아닌가”라고 하는 대목에서 기자는 잠시 인터뷰를 중단해야했다. 먹먹해진 가슴 탓이었다. 솔거미술관 상설 전시를 통해 이제야말로 화백의 진정성과 화업을 존경하고 있는 차제다. “경주 시민들과도 더욱 가까워졌다고 생각한다. 더 열심히 작업하고 좋은 그림을 선보이는 것 외에는 보답할 길이 없다” “소산예술의 실체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국제무대로 발전시켜야하는 전환점” 이번 특별전에서는 소산 화백의 신작으로 금강산의 겨울풍경을 그린 대작 ‘金剛雪景(금강설경)’을 최초로 공개할 뿐만 아니라 지난 반세기에 걸쳐 다져진 거장의 숨결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소산예술의 실체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전시에는 대작 외에도 소품과 채색을 넣은 작품도 다수 선보인다. 지난 전시작품 한 두 점 이외에는 신작을 포함해 모두 새로운 작품으로 채워진다고 한다. 이번 기념전을 열며 윤범모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예술총감독은 “등단 50년, 화업 반세기 소산예술의 진수를 한자리에 모은 전시다. 근작 중심으로 소산 예술의 완숙기에 일구어낸 대표작급을 모은 전시다. 수묵화가답게 묵향과 함께 한 반세기는 울림이 크다. 소산 예술의 총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평했다. 또 “이제 우리는 소산예술의 실체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국제무대로 발전시켜야하는 전환점에 이르렀다. 50년 소산 화업의 실체가 새롭게 펼쳐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번 특별전으로 경주솔거미술관은 한국수묵화의 메카로 도약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신라 선대의 우수한 혼들이 화백을 기다린 것은 아닐까. 당신이 도구로 쓰이는 것을 화백은 감지하고 있을까. “나는 경주의 혼을 표현하는 대변인일 뿐이다. 경주는 세계적인 창조 영감의 원천인 도시다. 그래서 오늘도 경주에 산다”는 화백과의 인터뷰는 늘, 큰 틀과 큰 흐름을 읽는 바로미터가 된다. 대가는 경주에 살고있는 오늘의 우리를 감사하게하고 동양 정신의 깊이와 우수성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가슴이 설레는 작업을 하고 싶다. 어깨에 힘을 줄 수 있는 그림을 원했다면 지금은 사회가 워낙 극렬하고 강퍅해 한 템포 늦추는 작업, 깊이 숙고할 수 있는 내실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 그 내실에는 진실이 녹아있어야 하고 노력과 수양이 더욱 가중돼야 한다” “모든 에너지를 작업에 쏟아붓고 집약해야 하는 것이 어떤 것보다 우선 순위다. 제대로 된 내 이름 석자를 남기려면 그 길 뿐이다. 백 번 말 할 필요가 없다. 한 필이 잘 떨어져야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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