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과 2013년 두 차례에 걸쳐 서유럽을 둘러보면서 대영박물관, 루브르박물관, 바티칸박물관 등이 소장하고 있는 수많은 유물과 미술품에서 인류 문명의 진수를 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사모트라케의 니케’상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루브르의 3대 예술품으로 흔히 밀로의 비너스, 미켈란젤로의 모나리자와 함께 이 사모트라케의 니케상을 들고 있다. 니케(NIKE)는 영어 발음으로는 나이키로, 세계적인 스포츠용품 회사인 나이키의 로고(logo)도 니케상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일명 승리의 여신상으로 불리는 니케상은 1863년 에게해 북서부 연안의 작은 섬 사모트라케에서 발견됐다. 높이 2.75미터의 거대한 조각상은 머리도 없고 팔도 없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은 활짝 펼쳐진 날개와 바람에 나부끼는 듯한 섬세하게 표현된 옷자락에서 에게해의 시원한 바닷바람이 느껴졌다. 금산재에서 발굴된 것으로 알려진 석조반가사유상. 머리와 양팔이 없어 니케상을 연상하게 한다.
1909년 경주 서쪽의 송화산 기슭에 위치한 김유신장군의 재실인 금산재(金山齋)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진 석조미륵반가사유상은 니케상과 마찬가지로 양팔과 머리 부분이 잘려 나가고 없다. 높이가 1.25m로 니케상에 비해 작고 재질이 화강암인데도 구멍이 많고 마멸이 심한 편이다. 하지만 니케상이 무른 대리석으로 조각을 한데 비해 이 상은 단단한 화강암으로 조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섬세하게 표현하고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혀 ‘신라의 니케상’이라 할만하다.
상체는 나체로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이고 허리는 가늘게 표현되었다. 오른쪽 무릎 위에 걸쳤던 오른쪽 팔꿈치 부분과 왼쪽 발목을 잡고 있는 왼손 일부가 남아 있어 반가사유(半跏思惟)의 자세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목에는 단순한 형태의 넓고 둥근 목걸이를 둘렀다. 왼쪽 어깨 부분에는 머리카락의 일부가, 왼쪽 손목에는 팔찌의 흔적이 남아 있다.
허리에 두른 군의(裙衣)의 띠가 두툼하여 상체와는 층을 이루고 있다. 오른발은 곧게 내린 왼쪽 무릎 위에 얹고 왼손으로는 오른쪽 발목을 잡고 있다. 하체에 걸친 군의는 두꺼워 두 다리가 풍만해 보이며 이로 인해 상 전체에 안정감을 더하고 있다. 옷 주름은 모두 이중의 얕은 선으로 간략하게 표현하였다. 군의 자락에는 장식이 더해져 있다.
좌우 측면은 세로로 옷자락과 띠가 흘러내리고 있는데 그 위 아래로 영락(瓔珞) 장식이 새겨져 있다. 뒷면의 옷주름은 어깨 부분에서 간단한 선각을 좌우대칭적으로 표현하여 좌우 측면의 추상적인 옷주름과 대조를 보이고 있다.
왼발 아래 족좌(足座)는 볼륨이 강한 단판복련좌(單瓣覆蓮座)이다. 대좌는 원통형으로 신체에 비하여 높고, 위로 갈수록 좁아져 허리 부분이 잘록하다. 그리고 아랫부분에 한 줄 음각선이 돌려진 외에는 장식이 없는 간단한 형식이다.
비록 크게 파손되기는 했지만 나머지 부분을 상상 속에 그려보면 국보 제78호와 제83호 반가사유상에 못지않은 훌륭한 불교 조각임에 틀림없다. 조성 시기는 7세기 초로 추정되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이와 같은 유형의 석조반가사유상으로는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에서 출토된 반가사유상이 있는데 현재 경북대학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반가사유상은 원래 부처님이 태자 시절에 인생무상을 느껴 고뇌하는 명상 자세에서 기원한다. 중국에서는 실제로 이와 같은 태자사유상(太子思惟像)이 많이 조성되었다. 이와 같은 출가 이전의 태자 모습은 현재 도솔천(兜率天)에 상주하면서 장차 용화수 아래에서 중생 제도하기를 기다리는 미륵보살 모습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미륵보살상도 반가사유 모습으로 조성하게 되었다.
하성찬 시민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