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을 학교에 보낸 후 장난감 얼른 치워놓고는 밀린 신문이나 드라마를 보고, 오늘 저녁엔 뭘 해먹을지 고민한다. 일상은 대부분 이렇다. 뇌와 손과 발 같은 신체의 각 기관들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어림하며, 쌓아둔다. 사람이 정보를 의식적으로 소화하고 처리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된다. 뇌 말이다. 신체 기관 중 제일 작은 편에 속하는 뇌는 덩치에 비해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뇌는 그 기능을 수행할 때에 가능한 한 에너지를 절약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여기저기서 밀려들어오는 모든 정보 가운데, 뇌가 사람의 의식으로 전달하는 정보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신경정보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계산 결과를 제시하고 있다. 가령 눈은 초당 1000만 비트의 정보를, 귀는 100만, 후각은 10만, 나머지 다른 감각기관 역시 10만 비트의 정보를 뇌로 전송한다. 이걸 모두 합해보면 초당 약 1100만 비트의 정보가 뇌로 전송되는 셈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초당 1000만 비트 중 사람이 의식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정보는 40비트에 불과하다. 시들해진 콩나물마냥 너무 버리는 게 많다고? 째깍 하는 일초에 40비트란 말이다. 고작 0,004%의 정보만이 사람 의식으로 전달되지만 일분, 한 시간, 하루를 놓고 본다면 이렇게 방대하게 노출되는 정보의 홍수 속에 그나마 정신 똑바로 차릴 수 있는 이유는 어쩌면 근무태만의 뇌 덕분이다. 아이러니 하지만 사실이다. 우리는 컴퓨터가 아니니까. 처음 오렌지 맛을 보는 애기들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말 재미난다. 엄마가 노랗게 생긴 이상한 물체를 가져온다. 칼을 가지고 이리저리 자르더니 조그맣게 생긴 뭔가를 살짝 입에 넣어준다. 늘 곁에서 내 시중(?)을 들어오던 존재가 주는 거니 처음에는 아무 의심 없이 입을 벌린다. 하지만 ‘어, 이게 뭐야?’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이상한 맛이다. 눈을 도저히 뜰 수가 없을 정도로 온몸이 마비가 되는데도 웃는 얼굴을 하며 ‘맛있지? 이건 오렌지라는 거야. 정말 맛있지?’한다. 웃으며 나를 죽이려드나? 애기는 헛갈린다. 냄새는 상큼하니 괜찮은데 뭔가 톡 쏘는 맛이 여태 경험해 본 게 아니다. 이렇게 우리는 온 몸으로 오렌지를 경험한다. 이제 오렌지의 맛은 완전히 알았다. 어른이 된 것이다. 직장 생활로 바쁘다가 모처럼 어머니 댁에 내려가는 길에 오렌지 한 봉지를 샀다. 어머니랑 같이 까먹으며 내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려고...., 여기까지는 아름다운 이야기고 왠지 따뜻한 겨울의 한 장면 같다. 이제 따뜻한 배경음악은 꺼지고 현실이 된다. 슈퍼마켓에서 아들은 귤 옆에 쌓여있는 오렌지를 망설임 없이 집어든다. 오렌지나 귤이나 비슷하게 생겼는데도 능숙하니 오렌지만 골라낸다. 그저 슬쩍 보는 정도로도 신선한 놈, 살짝 농익은 놈, 그리고 색깔이 얼룩덜룩한 놈을 정확히 구별해 낸다. 눈은 연신 좌우로 움직이나 머리는 한 번도 이 작업에 참여하지 않는다. ‘내일 아침 일찍 나서야 차가 덜 막히겠지?’ 중부고속을 계속 탈지, 도중에 갈아탈지 고민하는 중이다. 예가 너무 장황했지만, 처음 오렌지를 경험할 때와 이미 경험한 그것을 다시 대하는 뇌의 자세는 다르다. 이미 저장된 정보는 처음처럼 집중해서 다루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슬슬 결론을 내려 볼까. 전문가들 눈에 뇌가 보유한 진정한 독창성은 정보를 의식하는데 있지 않다. 오히려 정보를 무의식적으로 처리하고, 왜곡해서 저장하며 흔히 의식을 배제한 채로, 전문용어로 ‘멍 때리면서’ 행동하는 게 뇌의 위대한 능력이라는 거다. 충격적이지만 사실이다. 왜냐, 우리가 흔히 접하는 오렌지를 마치 처음 보는 애기의 눈으로 보고 애기의 뇌로 인식한다면 우리 뇌는 한 두시간만에 넉 다운이 될 테니 말이다. 다루어야 할 정보가 너무 많은 상황에 뇌가 진화할 수 있는 가장 세련된 방식은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로봇하고 바둑을 두는 세상이다. 그들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그들과 어떻게 다른지 우리 정체성부터 고민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세돌 프로는 정말 대단한 업적을 남겼고, 인류 뇌의 진화 방향은 매우 과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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