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장대는 신라 삼기팔괴의 하나인 금장낙안(金杖落雁)의 현장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도 이곳에 머물러 주위를 둘러볼 정도로 그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던 곳이다. 뿐만 아니라 선사시대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선사시대에 바위 면에 그린 암각화를 비롯하여 구릉 여기저기 옛무덤이 흩어져 있으며 그중 도굴 흔적이 남아 있는 고분도 남북 두 개의 봉우리 정상부에 각기 1개씩 있다. 그리고 부처님에 귀의하여 공덕을 쌓고자 했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발굴조사 결과 확인되고 있다.
또 『화랑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이곳에 화랑들의 수련장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의 건물지도 확인되는 등 아주 오랜 옛날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유적이 이 작은 한 공간에 모여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선사시대의 고인돌, 부근에서 수습된 임신서기석, 석조미륵반가사유상, 최근 발굴된 사리공양석상과 거북무늬석상 등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금장대는 시대적인 패러다임에 따라 그 공간적인 의미가 달리 이해되어 왔는데,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면 이곳은 시인묵객들이 ‘금장낙안’의 풍광 속에서 신라의 흥망을 생각하며, 자연의 영원함과 인간 삶의 부질없음을 인식하고 과거를 통해 오늘을 경계하던 공간이었다. 특히 1450년부터 1600년 사이에 많은 시인이 다녀간 흔적이 시가(詩歌)로 남아있다.
‘興亡萬古長如此(흥망만고장여차)’
흥망은 만고에 이 금장대와 같거늘···
조선 성종 때의 대학자인 매계 조위가 이곳 금장대에 올라와 주위를 둘러본 후 찬란했던 옛 서라벌에 대한 감회를 읊은 시의 일부분이다. 고려 말의 유학자인 야은 길재가 고려의 옛 도읍지인 개경을 둘러보며 느낀 망국의 한과 인간사의 덧없음을 노래한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라는 시조를 연상하게 한다.
또한 이곳은 임진왜란 때에는 경주읍성을 수복하기 위한 정찰기지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왜군들이 부산을 통해 동해로 물러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승리의 기쁨을 노래하던 곳이었다.
금장대 아래로는 동쪽 명활산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북천이 본류 격인 서천과 합류하여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소(沼)를 이루고 있다. 물이 매우 차고 깊은데 명주실 한 꾸리를 다 풀어 넣어도 밑이 닿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소를 이곳 경주 사람들은 애기청소 또는 예기청소(藝妓淸沼)라고 하는데 그 명칭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여러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첫째, 신라 자비왕대에 을화라는 여인이 이곳에서 왕과 더불어 연회를 즐기다가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 죽었다는 설.
둘째, 조선시대 이곳 경주지방 사대부들이 예기들과 풍류를 즐기던 자리라는 설.
셋째, 신라 때 귀족의 딸인 예기 또는 애기라는 처녀가 결혼을 앞둔 단오절 어느 날 친구들과 금장대 소나무에 매어 둔 그네를 타다가 떨어져 아래 강물에 빠져 죽었다는 설.
넷째,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이후 와전되어 매년 한명씩의 어린 아이(애기)가 빠져 죽었다는 설 등이 있다.
필자가 어렸을 때 해마다 몇 사람이 이곳에서 익사를 했고 가끔은 죽은 사람의 혼을 불러낸다는 초혼굿이 행해지기도 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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