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1월 31일(음. 1. 4) 晴 새해를 맞아 가훈을 쓰다. (正行爲人)장차남에게 주다’ 때로는 한 두 줄, 어느 때는 한 두 장의 분량으로 써 온 일기들은 진솔하기 짝이 없다. 괘릉리에는 여느 스타 못지않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이가 있다. 1936년 외동읍 괘릉리 출생의 일산 김진환 선생(81)이다. 선생은 괘릉리에 살면서 28살 때인 1963년 1월1일부터 오늘날까지 5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써왔다. 부인 김옥선씨의 지아비로, 오남매의 아버지로 열 명의 손주를 두고 있어 다복하기 이를데없는 생활이야기부터 농사를 지으며 마을 일도 챙기고 지역사회 봉사와 공헌을 하며 살아 온, 누구보다 부지런한 삶의 기록들이었다. 일기문을 읽어보니 시인이 따로 없고 문장가가 따로 없다. 이토록 진솔하고 진한 삶의 이야기라니..., ‘일기는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스승’ 이라는 선생의 회고가 적확하게 와닿았다. 일산 선생은 경주향교 장의, 가락경주종친회 부회장, 숭무전 참봉, 대한노인회 경주시부회장, 성균관유도회 경주지부부회장, 성균관유도회 외동읍지회장 등의 활동을 통해 여전히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활약과 봉사를 하고 있다. 경주시장상 3회, 경상북도지사상 2회를 비롯한 수상경력도 다양한 선생댁을 찾아 선생의 여든 인생 궤적이 담겨있는 일기를 들여다 보았다. -“일기는 제가 살아가는 지표이자 길잡이가 됐지요” 그간 써 온 일기를 한아름 들고 나오는 선생은 행복해 보인다. 기록을 하고 살아서일까. 선생은 매우 건강하고 활력적이다. 일기 외에도 툇마루 가득 펼쳐진 것은 1975년부터 써 온 영농일지와 금전출납부도 있었다. 한자와 한글 혼용문으로 쓴 유려하고 반듯한 필체의 손글씨 일기만으로도 선생의 성품이 가늠된다. 선생은 다섯 자녀의 아버지로서 자신의 아버지와 자신의 이야기를 후손에게 들려주고 싶었기 때문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고 밝히고 있다. 예전 오래된 일기장이었지만 정갈하고 꼼꼼하게 적어 어느 한 장도 구겨진 곳이 없었다. “번듯한 일기장이라는 공책도 귀해 영농일지에다 일기를 썼지요. 지금은 얼마나 공책이 좋습니까? 일일이 잉크를 찍어 펜으로 적다가 만년필로도 썼고 볼펜으로 언젠가부터 적기 시작했죠. 결혼 후 선친을 이어 농삿일에 본격적으로 전념하면서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농사를 한 해 지어보니 영농계획도 하고 싶고 어제 지은 농사일을 기록도 해보고 싶었죠. 반복된 일상은 ‘어제와 같음’ 이라고 쓰고 그날그날 일을 썼습니다. 90년대부터는 좀 더 소상하게 적었고 그 이후 사회 활동을 하면서부터는 활동한 내용을 적었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습관이 됐고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썼습니다”며 일기가 살아가는 지표이자 길잡이가 됐다고 했다. 같이 쓴 영농일지에는 특히 그해 부족했던 농사 경험을 이듬해에 보완해 시행할 수 있어서 농사짓는 결과도 좋았다고. 이 일기장 주인의 반려자는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상 같은 부인 김옥선(동네에선 도곡댁이라 불린다)씨다. 부인인 김 여사는 “매년 수확량도 많았습니다. 농사를 잘 짓는다고 신농씨라고 불렸지요. 지나가는 동민들이 우리 논을 유심히 쳐다봤을 정도였어요”라고 했다. 제초제 치는 시기, 모판 작업, 논물 가두기, 밑비료 시기, 모내기, 보식시기, 가지치기 등에 대해 그날그날 기록한 영농일지는 영농 길잡이로, 일기는 살아가는 길잡이로 작용했다. “요즘은 거의 모든 것을 휴대전화기와 컴퓨터 자판에 의지하다보니 손으로 글을 쓰는 것을 귀찮게 여길 정도지요. 일기만은 꼭 쓰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일기를 쓰는 것은 자신의 반성문이기도 해 자연히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 노력하게 되고 마음이 바르면 행동 역시 바르게 되고 이는 사회생활과 이어져 바르고 아름다운 사회가 되는 밑거름이 됩니다” -‘소도 조금씩 호흡이 거칠어지고 쟁기도 삐걱인다. 잠시 앉아 쉬며 담배에 불을 지핀다’ 그의 나이 36세 되던 날 1971년 4월2일 일기에는 ‘봄 아침 햇살이 유난히 밝은 날이다. 나뭇잎들도 연두색을 조금씩 더해가며 미풍에 몸을 맡긴 채 콧노래하듯 하늘거린다. 춘경으로 분주한 이웃들과 안부를 나누고 언제나 흙냄새 구수한 논갈이를 시작한다. 겨우내 얼고 굳었던 땅이 가르마처럼 양쪽으로 갈라지며 며칠 전 불국장에서 새로 구입한 새장화 바닥으로 전해지는 논흙의 감촉이 부드럽다. 쟁기 끄는 소도 걸음이 가볍다. 논밭에서 소와 농부와 흙은 일체다. 느린 걸음. 봄 햇살이 제법 따갑고 소도 조금씩 호흡이 거칠어지고 쟁기도 삐걱인다. 잠시 앉아 쉬며 담배에 불을 지핀다’라고 적은 대목에선 가히 낭만가객으로의 면모를 자랑한다. 2005년 12월 24일 일기에는 ‘참봉(숭무전 참봉) 임기 3년을 마치고 고유하고는 전을 나섰다. 김유신 장군묘 어귀에 ‘김진환 참봉 도임 기념식수’로 심은 배롱나무가 여름부터 가을까지 붉게 백일을 꽃피우며 선비의 정기와 문중의 영원을 장엄하고 있다’ 고 적었다. -각종 농기구와 행장도 잘 보관돼 있어 민속자료로 손색 없어 한국 전쟁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는데 다른 것은 싸지 않고 책보는 싼 기억이 있다고 회고할 만큼 원래 학구적인 성품이었다. 그래서일까. 선생은 ‘80년을 회고하며’라는 자서전도 발간했다. “지금까지 살아 온 경험을 자손들에 물려주는 일만 남았습니다. 지난해 팔순을 맞이해 결혼 60주년도 함께 기념하는 의미로, 부족하지만 제 일생 중 중요했던 일, 고생했던 일을 지역의 자랑거리 소개와 함께 만든 회고록 ‘80년을 회고하며’라는 자서전을 펴냈습니다”며 겸손해 한다. 지금도 자다가도 생각나는 글이 있으면 불을 켜고 적을 정도라고 한다. 선생의 댁에는 각종 농기구와 행장이 잘 보관되어 있어 가히 민속자료로 쓰기에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자신의 손때가 묻은 예전 농기구는 하나하나 해체해서 묶어서 보관하고 있다. 지금도 재현하려면 들어내서 조립해야 한다고. -‘고무신 70원, 생후 7개월 송아지 5000원, 반창고 5원, 모기장 425원, 막걸리 35원..., 선생은 또 괘릉리에 구전돼 오는 노래를 채록하기도 했다. 선생이 채록한 괘릉리 전래 민요는 ‘베틀노래’, ‘줌치 노래’, ‘꽃노래’, ‘쌍가락지 노래’, ‘치마노래’ 등이 전한다. 일기에 나타난 1960년대 물가를 보면 장화 1족 170원, 쌀 1되 74원, 손목시계 700원, 내의 한 벌 240원, 고무신 70원, 생후 7개월 송아지 5000원, 암소 1마리 2만 7300원, 자전거 펑크 때우는데 10원, 사이다 1병 20원, 반창고 5원, 모기장 425원, 닭 3마리 560원, 막걸리 35원, 살충제 15원, 증명사진 30원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마음을 열어두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마을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입니다. 가장 젊은 세대가 60대 후반이고 그들마저 나이가 더 들면 우리 뒤를 이을 사람이 없습니다. 이 마을을 지켜 줄 젊은이가 있어야 하는데 걱정입니다. 제 자식도 대처에 나가 있는데 다행히도 은퇴 후에는 고향에 돌아온다고 해서 다소 안심은 하고 있지요” 선생은 귀향하고 귀농하는 이가 많았으면 하고 바란다. “우리 마을은 예전부터 단합도 잘되었고 집성촌이 아니라 각 성이 골고루 살고 있어서인지 서로를 존중하며 화합하며 잘 살고 있습니다” “제 바람은 첫째, 부부가 건강하게 남은 여생을 사는 것입니다. 저희 부부를 비롯해 동민들은 괘릉리를 아끼고 가꾸며 일생을 살아왔지요. 또 하나 바람이 있다면 최근 우리 마을에 젊은이들이 이사를 많이 오고 있는데 원주민들과 소통이 원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들과 화합하는 자리가 만들어져야 괘릉리가 더 발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마음을 열어두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새로 괘릉리에 정착하신 분들과 거리감을 두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며 신구 주민간 소통을 강조했다. -평생 공부하기를 즐겨하고 이웃 돕는데도 발벗고 나서 선생은 자식과 손주들 모두 원만하고 건강하게 가정 일구고 화목하게 한 첫째 공로자로 부인인 김옥선 여사를 꼽는다. 선생 부부는 정월 초하룻날 부부간 세배를 한다. 이러한 내용을 여러 지역의 농협과 학교를 다니며 강의를 한다. 선생이 적극 권장하고 있는 덕목인 것이다. 매사 빈틈없는 성격의 일산 선생을 원망도 하려니와 취재 내내 서로 바라보는 부부의 눈에는 신뢰와 부부애가 가득했다. 선생은 대학이나 각 단체에서 풍수지리 강의나 예절 특강을 하며 여전히 안팎으로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다. 평생 공부하기를 즐겨하고 이웃 돕는데도 발벗고 나서는 선생은 96년부터는 꾸준하게 쌀을 기증하고 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