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을 지키며 살아가는 외동읍 괘릉리 사람들에게는 진한 향토애와 남다른 자부심을 느낄수 있다. 괘릉리에는 사적 제26호, 신라 제38대 원성왕(재위 785∼798)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인 원성왕릉(괘릉)과 신라의 절터 감산사지를 비롯해 이 마을 문화재로 영지석불좌상, 감산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 감산사지삼층석탑 등이 있다. 이 밖에도 100여 년 고택 수봉정을 땀 흘려 가꾸고 지켜왔다는 자긍심은 곳곳에 배여 있다. 또 괘릉 근처의 작고 아담한 괘릉초등학교는 시골마을의 정감을 더해 주고 있었다. 후손들에게 길잡이가 되고자 삶의 굽이굽이를 기록하고 보존하며 살고 있는 김진환 선생을 비롯해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 한 그루 조차도 살뜰히 아끼며 사는 주민들은 대대손손 이 마을을 지키고 아끼며 11개 부락에 321세대 700명의 주민들이 옹기종기 살고 있었다. 이곳 괘릉리는 ‘충효마을’로도 유명하다. 도회적인 신식 주택이 혼재돼 있었으나 여전히 시골 마을의 정서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마을이었다. 너른 벌판 사이로 조용하게 봄이 오고 있는 시골마을, 주민들의 역사적 저력과 자부심과 내공이 넘쳐흐르는 괘릉리를 찾았다. -마을의 역사를 1000년으로 추정, 마을 앞 괘릉이 있는데서 마을 이름 연유 괘릉리는 평지가 대부분의 지대를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배미기들, 앞들, 마을앞들 등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마을 서쪽에 영지못이 위치해 있다. 자연마을로는 괘릉마을 등이 있다. 괘릉리에는 제1, 2마을회관이 있을 만큼 마을의 규모가 크다. 이 마을 토박이 일산 김진환 선생의 ‘80년을 회고하며’라는 자서전에서는 ‘괘릉리는 토함산과 서쪽 마석산으로 이어지는 분수령으로 마을 뒷물은 북쪽으로 흘러 포항 영일만으로 들어가고 앞물은 남쪽으로 흘러 울산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한해 상습지역이다. 따라서 논은 적고 밭이 많았으나 1977년 덕동호가 준공되면서 농업용수가 관개돼 밭이 논으로 바뀌고 수리 안전지대가 돼 살기 좋은 동네가 됐다’고 적고 있다. 동 이름 괘릉은 마을 앞 왕릉이 있는데서 연유했다고 한다. 1849년부터는 능말이라 했고 1873년부터는 괘동이라 개칭해오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때 괘릉으로 개칭해 오늘에 이른다. 김진환 선생은 이 마을 형성 연대에 대해선 “마을 위쪽 감산사 절에 모셨던 국보81호 석조미륵보살입상과 국보82호 석조아미타불입상의 광배 뒷면 명문기에 신라 성덕왕 18년 즉, 서기 719년때 창건된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이미 마을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확실한 기록은 없다. 이로써 마을의 역사를 100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옛 경주군지와 풍물지에는 400여 년 전 이만훈 이라는 이가 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고 했다. -500미터 간격으로 11개 자연부락으로 이뤄져, 동리 수호신으로 생각하고 모시고 있던 왕릉제는 대제 봉행으로 1982년 종향 고해 괘릉리는 평균 500미터를 간격으로 11개 자연부락으로 이뤄져있는데 수봉정을 중심으로 하는 ‘큰(안)마을’, ‘싸리밭등’, ‘윗마을’, ‘볕골’, ‘샛(사이)마을’, ‘밤갓’, ‘밤갓등’, 시 경계지인 ‘터골’, 괘릉 서쪽의 ‘독골’, ‘왼곡(어인곡)’, ‘영지’ 등이다. 이 중 가장 적은 호수의 부락은 현재 5~6가구뿐인 볕골이고 가장 큰 부락은 샛마을이다. ‘80년을 회고하며’에서는 또 ‘동리의 전통 행사로는 릉씨름과 줄다리기, 지신밟기, 릉향사, 당신제가 있었다. 씨름과 줄다리기는 사라진 지 오래됐다. 지신밟기는 단합과 자금 조성을 위한 명절 풍물놀이로 주로 음력 정월 보름부터 약 1주간 행사한다. 동리 수호신으로 생각하고 모시고 있던 왕릉제와 당신제, 지신밟기는 옛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200여 년간 동네에서 봉사해 오던 왕릉제는 경주 김씨 종중에서 1983년부터 대제 봉행으로 동리 릉향은 1982년 10월 종향을 고했다’고 기록했다. 마을 주민들은 괘릉의 주인에 대해서는 40여 년 전 까지는 신라 제30대 문무왕릉이라 알았고 이후 10여 년간은 누구의 능인지 알지 못하다가 이후부터 현재까지는 신라 제38대 원성왕릉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동리의 안녕과 풍년 농사 기원하는 정월대보름 ‘동제’...‘샛마을’과 ‘밤갓’ 부락에서 지내 마침 괘릉리를 찾아간 지난 22일은 정월대보름날 동제를 치르는 날이었다. 마을 주민 이방우 선생은 “당신제는 자연부락 단위별로 행사를 한다. 제사 모시는 방법은 릉 제향과 비슷하나 다른 점은 밥을 지어가고 (현재는 밥이 없음, 밥이 있었을때는 3관이 제를 올렸다고 한다) 전에는 일년에 춘추로 두 번 지냈으나 현재는 1년에 1회를 지낸다. 현재 동제를 모시는 부락은 두 군데로 ‘샛마을’과 ‘밤갓’ 부락이다. 전에는 영지 부락도 동제를 지냈다고. 전에는 보름 하루 전 날 밤에 지냈었다. 현재는 어른들이 다 돌아가시고 젊은 층 해봐야 우리들 밖에 없다(선생은 80대였다). 우리 뒤를 이어 동제를 모실 이가 없다. 김진환 선생과 내가 안죽을때까지는 해야 된다(웃음)”고 했다. 정월대보름 샛마을 당신제 제주는 이방우 선생이었고 보조역할에 김진환 선생이었다. 그날 낮에 장을 봐서 제수를 장만해 제향하고 축이 없는 대신 ‘소지(엷은 한지백지에 불을 붙여 위로 올리면서 소원을 빈다. 예전에는 손가락을 태워 소원을 빈다는 뜻이었고 그만큼 소원을 간절하게 빌었다고 한다)’ 5~6장을 태워 올렸다. 소지가 유난히 잘 타올랐다. 아마도 올해 이 마을에 좋은 일만 생길 징조라 여겨졌다. 먼저 동리의 안녕을 빈 다음, 풍년 농사와 축산증식, 제주와 보조자에게도 축원을 한다. 축원문에는 농축산 소득증대/ 회원 남녀노소 무병/ 사업자 일일번창/ 학업자 성적증진/ 운전자 무사운행/ 등을 적어 읽으며 산신과 평토신에게 빌었다. 제향을 마치고 이방우 선생댁으로 향했다. 음복을 하기 위해 ‘추운데 고생했네’ 하며 몇몇 동민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기자도 보름오곡밥과 나물과 시래기찌게 등과 함께 동제 후 음식들을 함께 음복했다. “깨끗한 사람만 음복 할 수 있어” 이 음복도 산후이거나 상중인 사람 등 집안에 부정한 일이 있으면 하지 못한다고 했다. 이방우 선생은 “예전에는 동제 5일전에 제주가 술을 담았다. 그날부터 집에 금줄을 달았다. 부정을 막는 의미였다. 술을 담기 시작하면서부터 추운 정월 날씨에도 주제자는 정성껏 매일 목욕을 했다. 그만큼 정성을 다했다는 의미였다”고 했다. -괘릉 마을의 김진환 선생은 ‘스타’, 하루도 빠짐없이 써 온 50년 일기와 영농일지 알려져 이 마을엔 유독 대대손손 토박이들이 많다. 6, 7대손들은 부지기수고 400년을 이어온 14대 토박이 가문도 있다. 괘릉 마을의 김진환 선생은 ‘스타’다. ‘골동품 박물관’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집도 그러려니와 27살 때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써 온 일기와 영농일지에는 50년 전 오늘의 날씨뿐 아니라 당시의 일상이 손 글씨로 기록돼 있는 것. -이 마을 자랑거리...원성왕릉, 감산사지, 영지석불좌상, 고택 수봉정 사적 제26호 신라제38대 원성왕(재위 785∼798)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인 원성왕릉 (괘릉)을 비롯해 이 마을 문화재로는 시도유형문화재 204호인 영지석불좌상, 시도유형문화재 318호인 감산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 문화재자료 95호인 감산사지삼층석탑 등이 있다. 이 밖에도 100여 년 고택 수봉정은 이규인(수봉)선생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단아한 기품을 집안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을 선사한다. 일제강점기에 ‘실용적 선각’과 ‘사회의 정의 및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깊이 일깨워준 이규인 선생의 진한 삶의 이야기를 간직한 수봉정은 현재 선생의 후손 이태형 수봉교육재단 이사장이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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