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의 기록에서 고도 서라벌을 표현한 ‘寺寺星張 塔塔雁行(사사성장 탑탑안행’은 ‘절이 별처럼 총총하고 탑이 기러기처럼 늘어서 있었다’는 뜻으로 신라사찰이 그만큼 즐비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마도 절이 반이었고 집이 반이었을 것. ‘절반’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했다고 하니 신라에 절이 얼마나 많았는지 가히 짐작할 만하다.
현존하는 폐사지는 신라의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 피웠던 강력한 상징물로 오늘에 유전하고 있다. 경주 왕경복원사업에서 사찰 복원은 국찰이었던 황룡사 뿐이다. 당시 역사, 사상의 정립으로 신라가 통일의 대업을 이뤄냈지 않은가. 사상적 통합이 결집돼 통일전쟁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신라의 사찰이 지닌 의미는 매우 크다. 폐사지는 법등이 끊긴 사찰의 유허지다. 즉 불교적 신앙행위가 중지됨에 따라 그와 관련된 건조물이 없어지고 이후 흔적만 남게 된 것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경주의 많은 폐사지도 예외는 아니다.
본지에서는 원원사지, 미탄사지, 황룡사지, 장항리사지 등 사적지정사지 혹은 비지정사지 몇 곳을 소개한 바 있다. 이번호에서는 지역 내 폐사지의 현황과 문화재 지정 건수 및 최근 사적으로 지정된 인용사지의 의의와 지역의 곳곳에 산재한 폐사지의 가치와 의미를 짚어 보았다.
-경주 인왕동사지,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33호로 지정
인왕동의 ‘경주 인용사지’(慶州 仁容寺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40호)가 지난달 사적 제533호로 승격 지정됐다. 문화재청은 신라 태종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의 원찰(願刹)인 인용사(仁容寺)로 추정되는 절터를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경주 인왕동 사지’로 지정한 것이다. 인용사임을 명확히 규명할 수 있는 유물이 나오지 않아 사적명이 인왕동 사지가 됐다.
인왕동 사지는 2002년부터 약 10년간 네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진행돼 중문, 쌍탑, 금당, 강당, 회랑을 기본으로 한 신라의 가람 배치에 따라 절이 건립됐음이 확인됐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지어진 석탑 기단부에는 불법을 수호하고 대중을 교화하는 신인 팔부중이 조각됐다.
절터에서는 통일신라시대 기와가 주로 출토됐으며 자기류, 전돌류, 토기, 목간 등도 나왔다. 건축할 때 좋지 않은 땅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묻는 의례용 도구인 지진구(地鎭具)도 발굴됐다.
-인왕동사지 탑은 석탑이지만 금탑이었을 가능성 높아, 정비사업 통해 탑 복원하고 유구 정비할 터
현재 인왕동 사지에는 폐탑이 남아 있지 않으나 사적 지정 후 예산을 들여 정비를 할 계획에 있다고 한다.
경주시 문화재과 이채경 문화재 연구팀장은 “발굴전까지 탑 두 기가 허물어져 있었는데 발굴 과정에서 흩어진 탑재들의 도난 발생을 우려해 당시 발굴했던 경주문화재연구소에 임시 보관을 해놓은 상태다. 앞으로 정비 사업을 하면 그 탑재들을 다시 수습해 복원하고 유구를 정비해 절터였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고 했다.
전(傳) 인용사라는 절명에 대해서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인 오사카 긴따로가 ‘인용사’로 비정을 했으나 명확한 근거는 없다. 단지 추정컨대 월성의 바로 인근에 절을 짓는다는 것은 왕실과 깊은 인연이 있는 이일 거라는 추정을 하고, 동네 이름이 인왕동이며 이는 ‘인용’에서 변했을 것이라는 정황적 증거로 추정해 인용사 터라고 했을 것이다”고 했다.
“인용사지는 발굴이 끝나도록 명문 와편이 나오질 않았다. 명문 유물이 나오지 않자 문화재심위위원회에서는 세 번에 걸쳐 심의를 했고 결국 마을 이름을 따 ‘인왕동사지’로 사적 등록했다”고 했다.
“인왕동사지에서 중문 자리에 일자가 아닌 ‘아’(亞)자형 건물터가 있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것으로 다른 절터는 그런 사례가 없다. 또 쌍탑이 중문과 금당 사이에 좁게 배치된 점이 다른 신라 사찰과 구별되는 특징으로 조사됐다”
이 팀장은 “인용사 폐탑은 금판을 덮어씌운 것으로 보인다. 석탑이지만 금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탑의 옥개석을 보면 바깥에 구멍들이 나란히 뚫려있어 표면에 금판을 붙이기 위해 뚫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면서 “후일 탑 복원시 금을 씌워 금탑으로 복원해야 할 지, 석탑으로만 복원할 지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경주는 현재 남산 150여 곳과 남산 제외한 130여 곳 폐사지 산재
우리 지역에는 많은 폐사지가 산재해 있다. 황룡사지, 감은사지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절터도 있지만 이름조차 모르는, 알려지지 않은 절터가 더 많다.
경주 분포지도상 알려져있다 하더라도 통계화, 자료화에는 다소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경주는 현재 남산 150여 곳과 남산을 제외한 130여 곳의 폐사지가 산재해 있다.
이 중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곳은 황룡사지, 망덕사지, 사천왕사지, 흥륜사지, 감은사지, 장항리사지, 원원사지, 천군동 사지, 천관사지, 보문동사지, 인왕동사지 등 11곳이다.
이채경 팀장은 “문화재로 지정된다는 것은 유적과 유물이 잘 남아 있고 역사적으로 이름있는 곳이다. 절터가 잘 남아 있지 않고 역사적 유래가 덜할 경우엔 아직 지정이 안되고 있다. 최근의 인왕동사지 경우처럼 발굴 조사를 통해 실체를 밝혀 가설을 입증시켜야 지정이 된다”고 했다.
“결국은 예산 문제다. 문화재지정이 되지 않으면 국비나 도비 예산을 받을 수 없다. 지정이 안 될 경우는 전체적으로 시비로 충당해야 하는데 열악한 시 예산을 편성하기는 쉽지 않은 실정이다. 경주시 자체 재정으로는 폐사지 발굴, 시굴 등이 우선 순위에서 밀리는 것”이라고 했다.
-창림사지와 염불사지, 남산동 절터 등은 비지정 구역에서 별도 분리 지정해야
이 팀장은 “비지정 폐사지 중 도지동의 이거사지는 탑재가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성덕왕릉(삼국사기에 ‘왕릉은 이거사 남쪽에 있다’)을 비정하는 하나의 기준점이 되는 절터다. 매우 큰 규모의 허물어진 석탑이 남아있으며 규모로 봐선 창건 시기가 이르지 않을까 추정하고 있다”며 비지정 폐사지지만 지정 폐사지로의 가치가 있는 절터라고 했다.
이 팀장은 또, 비지정 구역에서 분리해야 할 필요가 있는 사지로 창림사지와 염불사지, 남산동 절터 등을 꼽았다.
“우선, 창림사지는 탑의 경우 지난해 보물로 지정이 됐지만 절터의 경우는 남산지정구역에 포함돼 있다. 발굴 조사가 마무리되고 창림사의 사역이 명확히 밝혀지면 남산지정구역에서 별도 분리지정 할 필요가 있다” “동남산 염불사의 경우도 절터는 남산지정구역으로 지정돼 있으나 금당지와 강당지가 민가 속에 포함돼 있다. 민가 속 사지를 확보해 정비 한 뒤 분리해 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서출지 근처 남산동 절터의 경우도 쌍탑이 보물로 지정돼 있지만 절터가 민가에 들어가 있어 사적으로 지정하기 어려운 실정이다”고 했다.
황복사지의 경우도 탑은 국보로 지정돼 있지만 절터는 경주 낭산 사적지정구역에 포함되어 있어 향후 발굴조사를 실시해 절터의 규모와 사역이 명확히 밝혀지면 별도로 분리해 지정할 필요가 있으며, 분황사의 경우도 탑은 국보로 지정돼 있지만 절터는 사적으로 지정돼 있지 않아 분황사 절터를 사적으로 추진중이라고 한다. 기림사는 대적광전만 보물로 지정돼 있다.
이 팀장은 “기림사는 창건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도 왕성하게 사세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여러차례에 걸쳐 중수 또는 중건되는 과정을 겪어 원래 신라의 절터가 어떠했는지에 대해 아직 구체적으로 알 수 없어 사적으로 지정 되지 않고 있다. 신라사찰의 원형이 변형됐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림사는 전통사찰로 지정돼있다. 전통사찰은 현재 불이 켜진 사찰로서 별도의 전통사찰보존법하에 관리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