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달을 맞아 조카 돌잔치를 한다는 전화를 받았다. 새해부터 이렇게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태어난 지 일 년이 지난 돌잔치 주인공은 사실 두 살이다. 그저께 뉴스를 보니 태어나자말자 두 살인 나이 셈법은 현재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밖에 없다고 한다. 그럼 엄마 배를 톡톡 차는 저 생명은 나이 없는 생명이란 말인지…. 불교 경전에는 이런 묘사도 있다. 석가모니불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상황을 설명한 대목이다. 태양의 종족인 샤카(釋迦)의 후손들이 세운 까삘라왓투(迦毘羅城)는 드넓은 평원과 아름다운 숲이 있으며 비옥한 국토에 곡물은 풍성하며, 백성들은 너그럽고 화합하길 좋아한다며 보살(부처가 성불하기 전으로 하늘나라 도솔천에 머무르고 있던 시절의 호칭)에게 추천하자, 그는 깊은 선정에 들어 사캬족의 혈통과 국토, 부모가 될 분을 자세히 관찰한 다음 “귀신별에 달이 모습을 담추는 밤, 나는 사꺄족 숫도다나왕(자신의 父)이 다스리는 까삘라의 마야왕비(자신의 母) 태에 들 것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쉽게 말해 자식이 부모를 선택한다는 말이다. 부모가 밤에 손을 꼭 잡고 자니까 아이가 생긴 게 아니라 자식이 알맞은 부모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불교식 시간론이고 또한 태교론이다. 시계나 달력에는 과거가 현재로, 현재가 미래로 이어간다. 단선적이고 일방적인 구조다. 그러나 불교의 이해는 다르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막 섞인다. 예전에 옆집에 살았던 순이를 지금 떠올려보면 그저 흐뭇해진다. 지나간 과거가 지금 이 순간 추억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과거지만 현재 속에 살아 있다. 로또 복권을 만지작거리며 “이 놈만 터지면, 차도 바꾸고 집도 더 넒은 평수로 가야지... 그래, 아예 회사를 통째로 사버려야겠다. 날 무시하던 과장님은 수위로다가 삼고...,” 상상만으로도 기분 좋다. 희망과 상상에 가까운 미래를 지금 끌어다가 즐기는 거다. 미래는 미래지만 현재 속에 살아 있다. 이런 맥락으로 보면 과거 속에 과거·현재·미래가, 현재와 미래 안에도 각각 과거·현재·미래가 있다. 이게 불교적 시간론이고 그 타당한 근거로 ‘시간은 의식의 흐름(流)’임을 드러낸다. 어쨌거나 엄마의 태반 속에서 꼬물대는 태아는 생명이 있으니 우리 정서상 한 살이 맞는다. 세상에 나오자말자 새해면 또 한 살 더 먹는 거고... 하나 둘 숫자 말고 한 살 두 살 자라나는 생명에 집중하면, 따뜻한 엄마 뱃속에 있는 녀석도 교육이 필요하다. 엄마가 동화책을 읽어주거나 모차르트 전집을 챙겨 듣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모차르트 효과(Mozart effect)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모차르트 음악만이 우리 아들 머리에 좋은 건 아닐 테니 말이다. 산모가 ‘닐리리 맘보’를 즐겨 들으면 그게 듣기 난해한 클래식보다 낫다. 고급스러운 클래식이 아니라 뽕짝일지라도 그 노래를 즐기고 흥얼거리는 산모의 심적 상태가 아이의 뇌 발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태교음악계에서 모차르트 효과는 다분히 상업적 영역까지 넘나드니 여기서 그만하자. 대신, 재미있는 실험이 있어 소개한다. 앤서니 드카스퍼라는 이름의 심리학자는 임산부들을 두 팀으로 나누고 각각 ‘모자 속 고양이’와 ‘왕과 쥐와 치즈’라는 동화 중 한 대목을 출산 직전 3개월 동안 매일 3분 정도 큰 소리로 읽도록 했단다. 아기들이 태어난 지 하루나 이틀 뒤 테스트를 했더니 아기들은 자신이 태내에서 들었던 동화를 더 좋아하더란다.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읽어도 마찬가지더란다. 태내 아기들이 실제 고양이 이야기를 알아들었을 리는 없었을 테고 그 이야기의 특징적인 리듬에 익숙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아기의 나이 시계는 째깍거리고 있음을 강하게 말해주는 예라 하겠다. 중국뿐 아니라 일본, 베트남 등 한자 문화권에서는 멀쩡한 만 나이 문화를 왜 버렸는지, 논리와 이성을 추구하는 서구 사회는 왜 이걸 받아들이지 않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무튼 필자는 다다음 주 간다. 두 살배기 축하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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