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은사지 석탑과 함께 도괴 파괴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꿋꿋하게 버텨 온 몇 안되는 신라의 석탑이 있다. 1962년 국보 제39호로 지정된 나원리오층석탑(羅原里五層石塔)이다. 높이가 8.8m인 석탑으로 경주시 인근에 있는 석탑 중 감은사지 3층석탑·고선사지 3층석탑 다음의 화강석제 거탑이며, 통일신라 중기 이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짜임새 있는 구조, 알맞은 비례는 주위를 압도하고 있었다. 경주 부근에 남아있는 석탑으로서는 드물게 아직도 조성 당시의 원형을 잃지 않고 있는 탑이다.
나원리오층석탑은 금장교를 지나 형산강을 따라 안강으로 가는 지방도변에 위치해 있다. 절터에는 오층석탑을 제외한 다른 유구는 남아 있지 않다. 또한 원래 금당터도 불분명한데, 탑 아래 낮은 대지에 위치했을 것으로 보여 사찰의 방위에 따라 옛 절의 금당 자리 뒤쪽에 세워진 전당후탑형(前堂後塔形) 가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원리오층석탑은 신라식 이중기단위에 오층의 탑신을 가진 점이 특이하다. 경주지역에서 신라시대 오층석탑은 이곳과 장항리사지 오층탑이 있다. 이 탑을 찾으면서, 소중한 국보를 너무 소홀히 대접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문화재 사각지대의 대표적인 경우였다고나할까.
‘나원 백탑’으로도 잘 알려진 이 불탑을 찾아가는 길은 진입로를 찾기 어려웠다. 내외국인 단체 답사팀들이 자주 찾는다고 하는데, 대형버스 진입이 불가능해 진입로 확보가 가장 시급해 보였다. 이는 경주시가 서둘러야 할 대목이었다.
-신라 팔괴(八怪)의 하나... 순백함과 청신한 기품 보여주는 ‘나원백탑(羅原白塔)’
이 탑은 각부의 비례가 아름다워 석재의 순백함과 청신한 기품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끼가 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고 탑의 재질이 유독 흰색을 띠고 있어 예로부터 ‘나원백탑(羅原白塔)’이라 해 신라 팔괴(八怪)의 하나로 불렸다.
이 탑이 위치한 지역은 화강암이 산출되는 곳이 아닌 것으로 알려져 제작 당시 다른 곳에서 원석을 옮겨와 탑을 건립했다고 추정한다. 특히 해체수리 시 탑 내부 적심에서 원석에서 떼어진 석편들이 다수 발견되어 폐기된 석재를 적심으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석탑이 위치한 사찰을 추정할 만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신라 41대 헌덕왕대에 대각사(大覺師)가 대각료(大覺寮)를 짓고 국운 창달을 기원하던 곳이며, 이곳에 보리림이 있었다고 한다. 40여 년전 석탑의 남서쪽 협곡에 나원사(羅原寺)라는 작은 사찰이 세워졌는데, 이는 마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석탑은 여러 차례 도굴 시도가 있었으나 다행히 도굴을 면하였고 1995년 11월부터 1996년 7월까지 해체수리가 진행됐다.
-“한창 도굴이 심했을때는 아침마다 탑 주변이 파헤쳐져 있었다”
나원사 주지 무학 스님은 “예전엔 도굴꾼들이 들끓었다고 한다. 도굴꾼들이 수 차례 탑을 도굴하려다 미수에 그쳤고 1996년, 도굴꾼들로 몸살을 앓던 탑의 붕괴를 염려해 해체복원하게 된 것이다. 한창 도굴이 심했을때는 아침마다 탑 주변이 파헤쳐져 있었다고 동네 어르신들이 말했다. 도굴꾼들의 소행이 너무 심해 원두막까지 지어 감시했으나 그 사이에 또 다녀가곤 했다고 한다. 현재는 기왓장 하나도 발견할 수 없다. 당시 유물들은 3층 기단부 중앙부에서 사리 장업구가 발견됐다”
“나원사는 현대에 지어진 이름이다. 여러 문헌에서 금곡산 자락이라 ‘금곡사’라는 설도 있고 옛 신라시대에는 비장산이라 불러 ‘비장사’라는 설도 있고 인근 연못 주변에 난이 많이 나서 ‘난원사’라는 설도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다”면서 폐사된 절의 이름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중기단에 오층의 탑신 지닌 석탑, 다른 신라 석탑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 보여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면석을 1매로 하고 그 위에 갑석을 올렸다. 상대갑석도 면석과 같은 4매로 구성되었는데, 오랜 기간 훼손이 심해 1996년 해체·수리 시에 새로운 부재를 끼워 복원했다.
옥개석은 1층과 2층이 옥개받침과 지붕을 별석으로 제작해 올렸으며 3층부터 5층까지는 1매석이다. 각층 옥개석은 처마의 반전이 경쾌하며 합각선 모서리에 1개, 전각부 양쪽에 2∼3개의 풍경공이 뚫려 있다. 상륜부는 노반석을 남기고 모두 결실된 상태다.
석탑을 구성하는 탑재의 숫자는 기단부가 16매, 탑신부가 15매, 잔존 상륜부가 1매로 총 32매이다. 이 석탑은 크기에 있어 대형에 속하며 결구방식에 있어서는 일정한 통일성을 보이고 있다. 또한 초층탑신을 4매의 판석으로 엇물림 결구한 점, 1층과 2층 옥개석을 옥개받침과 지붕을 따로 제작해 올린 점 등은 다른 신라 석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이다.
-사리장엄구에서 부처님 진신사리 15과, 금동사리함, 금동구층탑 3기, 금동삼층탑 1기, 순금 소불상 등 발견
대체로 다른 석탑들은 탑신석에 사리공을 마련한 반면 이 석탑은 3층 옥개석 상면에 사리공을 마련한 점도 특이하다. 바로, 옥개석 상면 사리공에서 사리함과 금동소탑, 금동소불 등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돼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방형 사리공 중앙에서 발견된 금동제방형사리함은 외면에 사천왕을 선조(線彫)로 새겨넣었는데 탑의 방위와 사천왕이 놓여진 방위가 일치하도록 장치되었다. 사리함 안에는 내사리기가 별도로 마련되지 않았으며, 금동제여래입상의 대좌 아래 오목한 부분에 사리(15과)가 안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6년 해체수리시 나무와 종이의 부식물이 쌓인 내부에는 X선 촬영 결과 높이 10cm와 7cm짜리 금속탑 4기, 높이 4cm의 불상 1구가 들어 있었다. 높이 10cm의 금속탑은 달개와 풍경이 걸린 정교한 3층탑으로, 이러한 금속탑이 사리함에서 나온 예는 드문 일이다.
1996년 해체수리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 가운데 부처님 진신사리 15과뿐만 아니라 상태가 양호한 금동사리함과 그 속에서 금동구층탑 3기, 금동삼층탑 1기, 순금 소불상, 먹으로 쓴 무구정광 대다라니경 파편, 구슬 30여 개 등이 발견됐다. 이들 금동탑은 형태와 세부모양에서 완벽에 가까워 신라탑 형태 연구와 복원에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사리함에서 발견된 묵서 ‘무구정경’ 조각을 통해 당시 서체와 신라사회에 있어 조탑경의 확산과 유통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무구정경은 704년 한역돼 국내에 유입된 경전이므로 나원리 오층석탑은 8세기 초반 이후에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 석탑은 장항리사지 오층석탑을 제외하면 신라시대 삼층석탑에서 벗어난 오층석탑이라는 점, 결구법에 있어 다른 신라 석탑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방식을 취한 점에서 한국 탑파사에서 갖는 의의가 크다.
-해체 발굴 당시, 부처님 진신사리 친견법회 및 장엄한 이운식 가져
해체 발굴 당시 ‘조계종보’에서는 ‘부처님 진신 사리에 대한 신앙은 수많은 석탑을 조성하게 했다. 석탑은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지극한 신앙심으로 조성했기 때문에 당시 가장 뛰어난 예술품이었다. 해체 공사중 발견된 나원리오층석탑에서 나온 갖가지 사리 장엄구들은 모두 귀중한 삼보의 보물일뿐만 아니라 사리 신앙의 결정체인 부처님의 진신사리까지 봉안돼 있어 사리 신앙에 대한 불교도들의 간절한 소원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있는 소중한 보물이다’, ‘1996년 당시 1300여 년 만에 나온 부처님 진신사리 친견법회가 마련됐다. 문체부는 우리나라 대표 종단인 조계종에 잠시 위임해 조계사에서 국가가 인정한 이운식 및 부처님 진신사리 친견법회를 덕수궁에서 조계사까지 장엄한 가운데 대대적으로 열었다’고 적고 있다.
나원사 주지 무학 스님은 “이후 신성한 부처님 진신사리는 복제가 불가능해 대중들을 위한 특별친견법회가 끝난 뒤 다시 복원 당시 석탑에 봉장되었다”고 했다.
현재 석탑 아래 앞마당에 조성중인 잔디밭과 주차장은 석탑환경정비차원이라고 한다. 올해는 비가 잦았던 동절기라 공사가 일시 중단돼 예정보다 다소 공사 진행이 지연되고 있다고 한다. 탑 참배객을 위해 우선적으로 탑 주변의 경관을 정비하는 차원인 것.
무학 스님은 “진입로뿐만 아니라 공중화장실도 갖춰야 한다. 나원사에 딸린 화장실이 있긴 하지만 재래식어서 나원오층탑을 찾는 탑 참배객을 수용하기에는 적합지 않다고 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