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에 그림그릴 일이 태산같아 심심하지 않다던 화백, 그림장이의 여생은 그림 그리는 일뿐이라며 스스로를 참 행복한 사람이라 하던 손일봉 화백. 자연에 대한 겸허한 자세와 어린애 같은 눈을 가져야만 자연이 갖는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발견할 수 있다던 화백은 이제 우리 곁에 없다. 비록 몸은 갔지만 그의 예술혼은 소담한 정물화 속의 꽃 한 송이에도, 복숭이 한 개 속에도 너무나도 생생히 살아남아 있다’
‘대구문화’, ‘그림은 나의 인격’-외길 60년, 향토 화단의 거목 손일봉 화백-에서.
이번호에서는 지난 1218호, 경주출신 1세대 작가 7인 중 토수 황술조 선생에 이어 두 번째로 현대 회화의 산증인이자 우리나라 리얼리즘의 구축에 이바지 한 손일봉(1907~1985) 선생의 예술과 업적을 조명하며 그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내년이면 손일봉 선생 탄생 110주년이다.
이를 기념해 ‘손일봉 탄생 110주년 기념전(가칭)’을 내년 상반기에 (재)경주문화재단에서 특별 전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특별전을 계기로 한국미술사에서 손일봉 선생의 작품이 더욱 정당하게 평가받아 선생의 그림을 적극 발굴해 경주에서 여러 작품을 만날 수 있기를 염원한다.
이 기사를 구성한 모든 자료를 제공한 최용대 서양화가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며 선생의 자료를 바탕으로 기사가 구성됐음을 밝힌다.
-경주예술학교 설립해 초대 교장...타계할때까지 맹렬한 제작 계속해 수백점 걸작 남겨
선생은 1907년 경주 현곡면 소현리에서 출생해 1928년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1929년~1934년까지 일본으로 건너가서 동경 우에노미술학교(上野美術學校) 유화과를 졸업했다.
재학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이 뛰어나 당시 한국화단의 유일한 등용문이라 할 수 있는 선전(鮮展 :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 1회, 특선 3회를 기록하였으며, 1928~31년까지는 일본 제전(帝展)에서 입선 4회를 한다.
일본에서는 제전과 광풍회전을 중심으로 활약하였으며 10여 년을 북해도에서 보냈다. 북해도 시절, 작가적인 자기 도약의 정체성은 잃어버렸고 고국 미술계와의 유대는 끊어지고 의욕적 작가의욕을 상실하는 안타까운 시기에 빠져든다.
광복 후 일체의 화단 활동을 중지하고 고향인 경주에서 생활하는 동안은 1946년, 경주중학교 부설 사범학교에 재직하고 1948년~50년은 김준식, 김만술, 권태호, 주 경 등과 함께 경주예술학교를 설립해 초대 교장에 취임한다. 제1회 졸업생인 조희수, 박기태, 이수창, 박재호 등 현역에 활동한 서양화 수채화 작가를 배출했다.
1952년 폐교 될 때까지 혼란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100여 명의 미술 지망생들이 이 학교를 거쳐갔다. 그 공로로 선생은 1956년 제1회 경북문화상을 수상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종군화가로 복무했으며 ‘형산강 전투’, ‘병사들’이라는 작품들을 남겼다. 신라중학교, 경주여자중학교, 의성여자중학교 등 25년여 동안을 중고교 교장으로 지내며 작가로서는 긴 침체기를 겪었다.
이 시기에 대해 ‘1987년, 손일봉 화백 유작전에 부치는 글(세종대학교 교수 김창호)’에서는 ‘화가로서는 애석한 시기였다’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정년퇴직 후 1971년 세종대학교(구 수도여사대)회화과 교수로 초빙되면서 다시 왕성한 제작 활동을 재개해 화단에 다시 복귀하면서 비로소 본격적인 작가생활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어 국전 초대 작가, 심사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좋은 작품을 발표해 건재함을 과시했다. 대학에서 정년 퇴임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대구로 내려가 본격적인 창작 생활에 몰입해 1985년 향년 80세로 타계할때까지 맹렬한 제작을 계속해 수백점의 걸작을 남겼다.
한국신미술회와 1987년 순수유화그룹 한유회를 창립해 한유회에 남은 열정을 바쳤다. 작품 세계는 평범한 주변의 소재를 완벽한 기초 위에서 초월한 심미안과 확실한 표현 방법으로 강한 실재감을 주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화면에서 후기 인상파 세잔느의 우주감과 강한 리얼리티와 진실을 느낄때 그의 대화가로서의 한 편모를 엿볼 수 있다. 마지막 15년 여의 창작생활은 그의 전생애를 건듯, 전력을 기울였기에 그 많은, 좋은 작품을 남겼다’고 썼다.
-현대 회화의 산증인...한국 전쟁 당시 종군 화가로도 활동해
화가 손일봉에 대해 법정 스님은 “손일봉은 우리나라 서양화가 도입되던 초기부터 1980년대까지 현대 회화의 산증인으로, 뛰어난 묘사력과 완벽한 색조의 시각적 수법으로 자연주의 예술을 고집했다. ‘그림은 나의 인격’ 이라고 하며 작품에 엄격성을 강조, 자연에 대한 태도는 겸허해야한다며 그 시간, 장소를 고집했다”고 회고했다.
‘대구문화’, ‘그림은 나의 인격’ -외길 60년, 향토 화단의 거목 손일봉 화백-에서는 ‘천성적으로 강직했던 선생의 성격은 변화하는 세파에 타협하지 않고 외곬로만 파고들었다.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일관적 추구는 성격탓도 있지만 방법보다는 미 자체를 추구하는 것이 미술이라는 그의 예술가적 기질의 발휘로 말미암은 것으로도 보여진다’고 회억했다.
박경숙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사의 ‘한국 근대미술사에서의 경주의 재발견-1세대 작가 7인을 중심으로’에서 손일봉 선생에 대해서는 “매우 성실히 작업했던 분으로 다작을 했으면서도 수작을 남긴 분이다. 물의 조절이나 음영에 탁월해 단연 수채화가 돋보였다. 1967년 독도스케치는 험난한 시절의 적극성을 보여주는 일면이다. 또 한국 전쟁 당시 종군 화가로 활동해 한국 미술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고 했다.
‘영남의 구상미술’전에서 박래경은 “청년시절 그의 예술적 능력을 높이 평가받던때의 청년화가 손일봉, 천혜적 재능으로 비약적 발전의 앞날을 약속받던 양화가 손일봉이 그 후 자의건 타의건 보내야했던 동면의 오랜 시기를 번갈아 겪어가면서 노익장을 괴시하게 된 노년기를 맞이하게 될 때까지 화가로서의 그의 생은 우여곡절로 점철되었다고 볼 수 있다”면서 “이는 회화 예술에만 열중할 수 있었던 시기와 그 사이 교육계에 몸담아 온 시기 사이의 일정한 간격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만큼 한 예술가로서 고뇌와 불행을 뜻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같은 시련기가 있어 그의 예술적인 저력을 과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은 또한 다행한 일이다. 그림은 작은 것을 크게 확대해 보이도록 그리는, 일종의 자연주의를 추구해 세잔 경향을 받아 하나의 사실세계를 확립해가게 됐다. 이에 우리나라 리얼리즘의 구축에 이바지 하려했다”고 적고 있다.
또 “70년대에 그는 제작열의 회복을 꾀해 예술세계를 가일층 정열적으로 꽃피운다. 구축적이고 견고한 그의 그림세계는 일정한 공백에도 불구하고 능히 극복 할 수 있는 힘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며 손일봉 선생의 삶과 화업을 집약해 표현했다.
-‘맑은 소리’ 손일봉 특집(1999)에서 제자 회고기와 대담기...“경주에서 선생의 그림을 볼 수 없다는 것은 하나의 희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어”
‘맑은 소리’ 손일봉 특집에서 고 이재건 화백은 “황술조의 뒤를 이어 일본 유학길에 오른 이가 손일봉 선생이다. 천부적 예기와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선생은 생존시에 스스로 ‘구태의연한 자세로 그저 주위의 사물을 느끼는대로 그렸다’고 현대미술 양상과의 거리를 소박하게 표명했다. 그러나 그는 한 시대를 살며 성실하게 체득했던 서정적 자연주의 시각적 수법으로 예술세계를 창조하고 실현시키는데 충실하려고 했던 진실성 그 자체로 능히 평가 받을 수 있는 엄연한 자취를 남겼다”고 했다.
‘맑은 소리’ 손일봉 특집(1999)에서 제자 차상돈 (대구일요화가회 회장 역임)씨는 “선생님의 인상은 작은 키에 다부지고 엄격한 인상이었다. 선생님의 산책은 동경시대에는 은좌를, 서울시대에는 명동을, 대구에서는 동성로를 택해 꼭 제시간에 맞춰 산책하셨다. 1990년 사모가 53점의 유작품을 대구시에 기증했는데 시민회관에서 유작전을 열어 주었다”고 했다.
한편, 김봉환 작가는 ‘맑은 소리’ 손일봉 특집 ‘동양의 귀재 손일봉, -동쪽의 손일봉, 서쪽의 오지호-’에서 제자 이수창 교수, 이재건 화백과의 대담기를 통해 선생의 족적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선생에 대한 추억과 에피소드를 실감나게 엿볼 수 있었다. 그 대담기를 요약해 옮겨보았다.
이수창: “상세하게 그리면서 총체적인 것을 머리에 담고 그것을 한 두 붓에 팍, 처리를 하는데 숙련된 기능이 아니고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경지다. 지금 우리나라 원로들도 열 번 죽어도 손일봉 선생의 생각이나 테크닉에는 족탈불급이다. 참 놀랍다” “‘그야말로 잡초 한 포기에도 신을 느끼는 그런 겸허한 마음이 아니면 회화하는 사람으로서 자격이 없다. 결코 예술이라는 것이 쉽게 재간을 부려서 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 선생의 지론이었다”
김봉환: “장인 어름이 돌아가셔서 술에 취하셔서는 ‘사실주의 그림은 내가 세계에서 최고다’라고 고함지르시는 걸 본적이 있다”
김봉환:“지금 원로분들은 손일봉 선생님의 작품 수준을 최고의 수준으로 보십니까?”
이수창: “그렇지요. 동쪽의 손일봉, 서쪽의 오지호라 한다”
이수창: “재치있는 걸 굉장히 싫어하셨다. 기술이 있는건 좋은데 고도의 기술이 있어야지 그 기술이 표면에 드러나는 걸 싫어했다”
이수창: 선생에게 지조를 배웠다면서 “‘늙어가지고 젊어지려고 빨간 넥타이 매지 마라. 꾸준히 자기 영역을 끝까지 관철해 나가줌으로 해서 뒤에 따라오는 사람한테 도움이 되는 거지 중간에 변절해 버리면 가치가 없다’라고 하셨다. 선생은 만년까지 변함없이 한결같으셨다”
김봉환: “굉장히 다작을 하셨다. 수 백 편 중 어느 하나 타작이 없는 최고의 수준으로 알고 있다. 돌아가셨을때도 200여 편 정도 남겨두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수창: “내 기억에는 적어도 선생님은 작품을 하시다가 중간에 그만두는 법이 없고 한 작품을 시작하면 끝장을 내고 만다”
김봉환: “선생이 일본 교직에 계실 때 찾아온 항일운동 학생들을 많이 돌보기도 했다고 한다. 어느때는 양식이 없어 겨울인데도 난로를 팔아 양식을 조달한 적도 있다고 한다. 선생은 생전에 자신의 그림이 큰 미술관에 소장되기를 원했던 것 같다. 유족에 의해 선생의 뜻대로 됐다. 그러나 경주에서 선생의 그림을 볼 수 없다는 것은 하나의 희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대담을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