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황동 황룡사지 부근에는 신라때 ‘미탄사(味呑寺)’라는 큰 절이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어느새 짧은 겨울 해가 지려는 오후 4시경 찾은 신라 미탄사지는 삼층 석탑만이 그 존재를 희미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경주시가 보물로 지정 추진하고 있다는 이 삼층 석탑은 담담하고 무심한 듯 단순한 3층탑의 전형적 양식이었다. 이런 석탑을 시내 한 복판 벌판에서 보는 예는 잘 없다고 한다. 미탄사지는 경주 폐사지 중에서도 시민에게조차 비교적 덜 알려져있는 편이다. 황룡사지 부근임을 알았음에도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다. 몇 차례 진입로를 놓친 후 농로를 따라 겨우 삼층 석탑이 있는 사지에 근접할 수 있었다. 폐사지는 법등이 끊긴 사찰의 유허지를 의미한다. 즉 불교적 신앙행위가 중지됨에 따라 그와 관련된 건조물이 없어지고 이후 흔적만 남게 된 것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경주의 많은 폐사지도 예외는 아니다. 삼국유사에서 고도 서라벌을 표현한 ‘사사성장 탑탑안행(寺寺星張 塔塔雁行, 절은 하늘의 별만큼 많고 탑은 기러기가 줄지어 서 있는 듯하다)’은 오늘, 더욱 공허해 보였다. 2013년부터 시굴조사를 했던 콘테이너 몇기만 미탄사지를 외롭게 지키고 있었다. 현재 발굴 조사는 답보 상태로 보였다. -미탄사지... 삼국유사에 이미 오래된 폐허로 기록돼 있어 그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 구황동 들판 한가운데 있는 신라시대 절터로, 미탄사 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한다. 절의 정확한 건립연대나 조성 경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고려 때 지은 삼국유사에 이미 오래된 폐허로 기록돼 있어 그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80년 6월 삼층석탑을 복원하기 위해 일대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도침편(陶枕片)·석제 불두·석탑 상륜부편·보상화문전범·이형금동제품 등이 수습됐다. -미탄사지 삼층석탑...1980년 발굴시 소금동불입상, 수정제 장식, 금동제 영락 발견 미탄사지에 있는 삼층석탑으로 1980년 6월 미탄사지 일대를 발굴해 흩어져 있던 탑재를 모아 복원한 삼층석탑으로, 높이 6m, 기단 너비 3.86m다. 발굴 당시 탑 기단부에서 소금동불입상 1구, 수정제 장식 2점, 금동제 영락(金銅製瓔珞) 1점, 흙으로 만든 벼루편 등을 포함한 유물 30여 점이 발견되었는데, 유물의 성격으로 미루어 9세기 중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적심부(積心部)를 조성하면서 돌과 찰흙을 섞어 다진 후 불에 구워 단단하게 만드는 특이한 공법을 사용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 탑 주위로 낮은 철제 울타리를 둘러 보호하고 있다. -2013년, 문헌 속 미탄사지 실체 첫 확인...대형 금당지·나한상 발견 미탄사지가 신라 서라벌의 전성기 당시 도시 환경을 증언해 주는 귀중한 가치가 있음이 확인됐다. 2013년, ‘삼국유사’에 이름만 등장하는 미탄사지에서 대형 금당지와 토제나한상이 발견된 것이다. 불교문화재연구소가 진행한 경주 미탄사지 시굴조사를 통해 미탄사지의 실체를 처음 확인한 것이었다. 금당으로 추정되는 정면 8칸×측면 4칸, 건물의 길이가 약 37m에 이르는 대형 건물지와 사찰 동남편 건물지에서 출토된 토제나한상은 하반신은 사라졌으나 왼쪽 어깨에 가사를 걸치고 우측 손을 뒷머리에 댄 채 탄식하며 절망하는듯한 표정은 투박하지만 매우 생동감있게 표현돼 있어 흥미를 끌었다. 또 인화문토기와 납석제 호편과 뚜껑, 귀면와, 기린문전(麒麟文塼), 다양한 문양의 와당류를 비롯해 ‘의봉4년개토(儀鳳四年皆土, 679년)’ ‘습(習)’ ‘대토(大土)’ ‘정(井)’자 명문와 등도 확인됐었다. -2014년, 미탄사지 ‘味呑’ 사찰명 최초 확인, 삼국유사에 실린 황룡사, 미탄사, 독서당 연결고리 ‘삼국유사` 속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미탄사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했다. 2014년도 중요 폐사지 시·발굴조사 사업인 미탄사지 유적의 2차 시·발굴조사 현장보고회에서 미탄사지 동북쪽 사역으로 추정되는 담장열 4기, 강당지로 추정되는 건물지, 종각지 또는 비전지 등으로 추정되는 1칸의 적심건물지 등의 유구와 ‘味呑’명 기와와 ‘井’자명 전돌, 연화문·쌍조문 당초문 와당류, 인화문토기(도장무늬토기)와 납석제 뚜껑 등의 유물을 공개했던 것이다. 특히, ‘味呑’명 기와가 여러 점 확인돼 주목을 끌었는데, 이는 그동안 추측만 해오던 미탄사의 위치를 최초로 증명하는 자료며 미탄사와 더불어 최치원의 고택인 독서당의 위치까지 방증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았던 것으로 이 명문 기와들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 -미탄사지 유적 ‘중요 폐사지 시·발굴조사 사업’의 첫 조사지로 2013년부터 조사 중 이 사업은 전국에 산재한 사지와 사지 소재 문화재의 훼손이 심각하지만 그 가치와 실태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는 현실에 주목해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사지(폐사지)에 대한 단계별 종합정비계획의 하나다. 불교문화재연구소는 이 계획에 따라 2010년부터 권역별로 ‘폐사지 학술조사사업’을 시행하고 있으며 이 조사를 기초로 중요 사지를 선정해 2013년부터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중요 폐사지 시·발굴조사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미탄사지 유적은 ‘중요 폐사지 시·발굴조사 사업’의 첫 조사지로 2013년부터 조사 중이다. 이 절터의 잠재력은 크다. 미탄사지에서 여러 유적 유물이 발견돼 통일신라시대 불교문화 연구가 탄력을 얻었는가 하면, 미탄사가 새로운 역사적 가치를 얻은 것이다. 앞으로 정밀 발굴조사를 통해 미탄사의 규모와 성격 등이 파악돼 통일신라 시대 도심 속 왕경인의 신앙생활을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역사문화경관(월성, 동궁과 월지, 황룡사지 등)과 어우러지는 보존과 활용으로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미니 인터뷰, (재)불교문화재연구소 박찬문 발굴팀장이자 미탄사지 책임조사원 박찬문 발굴팀장은 “2013년과 2014년 2차례에 걸친 시굴조사를 했다. 앞으로 정밀 발굴조사를 하게되면 조사비용이 20억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에 대한 예산 증액을 문화재청과 협의를 하고는 있지만 원만하게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2차 조사 후 자문회의에서 김동현 자문위원은 ‘황룡사와 미탄사 등을 하나의 점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 주변 일대가 불교를 큰 축으로 통일의 대업을 이뤄낸 배경으로서,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 사업’에 불교문화의 복원을 제언했다. 황룡사가 복원됐을때 황룡사에서 바라보이는 것은 미탄사지 석탑뿐이다. 따라서 왕경 복원 사업에 미탄사지도 포함돼야 한다고 문화재청과 함께 당부했으나 잘 반영이 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그는 또, “경주 왕경복원사업에서 사찰 복원은 국찰이었던 황룡사 뿐이다. 당시 역사, 사상의 정립으로 신라가 통일의 대업을 이뤄냈지 않은가. 사상적 통합이 결집돼 통일전쟁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사찰이 지닌 의미는 매우 크다. 단지 하나의 단위 사찰로의 복원이 아닌가라는 생각에서 안타깝다”고 했다. “황룡사 복원에만 치우치는 것이 아쉽다. 황룡사 바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미탄사지가 어느 정도 정비가 되면 결국은 신라의 낭산과 연결고리로서 역할 할 것이다. 이는 미탄사와 독서당의 위치를 기록한 것에 대해, 삼국유사에서 ‘최치원은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 황룡사 남쪽에 있는 미탄사의 남쪽에 옛 터가 있다. 이것이 최후(崔侯)의 옛집이 분명하다’라고 기록된 내용을 근거로 지금의 자리로 추정되어 온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탄사지를 매개로 낭산을 넘어가면 선덕여왕릉, 사천왕사지, 망덕사지, 신문왕릉, 능지탑, 황복사지 등으로 연결될때 스토리가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미탄사가 지니는 역사적 의의에 대해 “신라 왕경의 방리(坊里, 고대 도시구획 단위) 구획 안에 조성된 명확한 도시 가람 유적을 새롭게 파악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닌다. 경주시에서도 미탄사지 삼층석탑을 보물로의 지정을 추진하고 있지만 시내 한 복판 벌판에 있는 탑의 예는 흔치 않다. 황룡사가 불 탄 이후에도 분황사와 함께 법맥을 이어왔던 사찰로서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고 전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