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보아하니 아들 녀석 아주 침울하다. 던져놓은 가방이나 막 갈겨쓴 숙제를 보더라도 상황은 심각했다. 스트레스를 받는 걸 보니 이제 곧 기말고사가 다가왔다는 증거다. 누구나 스트레스는 받는다. 애들도 예외는 없다.
운동장에서 바람 빠진 공을 쫓아 온몸으로 낄낄대는 녀석들도 시험 때만 되면 똑같다. 그저 뛰어놀아야 할 나이에 스트레스라니…. 좀 짠하다. 그렇다고 스트레스를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 테고 견뎌내야지 뭐 방법 있겠나.
그 스트레스를 흥부한테 적용해보면 어떨지... 판본마다 차이는 있지만 가난한 흥부는 대략 20~33명 정도의 자식이 있다! 돈 많은 부자인 형 놀부는 무자식인데, 당장 본인 입에 풀칠도 못하는 흥부는 도대체 애들은 왜 줄줄이 낳았을까?
보통 인간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물리적 위험에 노출될 경우 인체의 생명력을 높이게 된다고 한다. 늘 메마르고 건조한 사막에서 자란 석류가 달고 맛이 좋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척박한 환경에서 기필코 후손을 남기고자 자연이 최선의 역량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사막이라는 환경이 익숙지 않다면 우리 주변에서도 이런 예는 얼마든지 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화초들 키우신 경험들 있으실 거다. 꽃이 너무 예뻐 물을 필요 이상 지속적으로 주면 그저 잎만 무성해지는 경우 말이다.
반면에 평소 까먹고 있다가 ‘아이고, 말라죽게 생겼구나!’ 하고 허겁지겁 물을 준 화초는 잎은 영 아니지만, 나중에 예쁘고 화려한 꽃을 피워 보답하는 경우들 말이다.
화초들만 이런 게 아니다. 우리 인간도 똑같다. 흥부는 가난이라는 물리적 위험요소에 적응하려고 아이러니하지만 애들을 주렁주렁 낳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흥부놀부 이야기는 우리 선조들이 향유한 진화심리학의 수준을 알려주는 바로미터라고 주장한다면 이건 좀 오버일까.
그건 그렇고, 전제가 붙긴 하지만 가끔 스트레스를 받는 게 오히려 건강에는 좋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미국과 캐나다 연구진이 중심이 되어 스트레스에 관련된 논문 300편을 살펴본 결과, 학교에서 기말시험으로 며칠 정도 받는 스트레스는 오히려 신체의 면역체계를 강화한다는 재미있는 사실을 밝혔다고.
눈치들 채셨겠지만 전제는 스트레스 받는 기간이 짧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 연구에서도 오랜 스트레스는 질병과 싸울 수 있는 능력을 현격히 저하시킨다고 경고했다. 강한 스트레스를 받아도 충분히 쉬거나 회복할 시간이 있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건강을 해치는 것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스트레스다.
이 연구로 다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스트레스가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스트레스가 인체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지만 좋은 스트레스도 있다는 이야기다.
상상이지만 바로 코앞에 사자가 아가리를 벌리고 나를 노려보고 있다고 치자.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스트레스는 인체를 ‘전투’냐 ‘도주’냐에 대한 판단을 돕고, 만약 물렸을 때 상처 등으로 인한 감염에 대한 저항력을 강화하는 면역체계를 형성한다고 연구보고서는 말한다. 인류가 효율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스트레스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래 아들아, 너도 시험을 ‘좋은 스트레스’로 받아들여. 중고등학교 형아들은 몇 배 더 힘들어. 그래도 너처럼 엄살을 부리지는 않잖아. 시험 끝나면 곧 방학하지, 그러면 아빠랑 캠핑도 갈 수 있지, 얼마나 신나겠냐.
이 녀석 앞에 놓여있을 수많은 시험과 스트레스를 아는 아빠가 천진난만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짠해진다. 하지만 어쩌랴. 우리 인간은 이렇게 스트레스와 싸우거나 때로는 친하게 지내며, 같이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