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하게 예술적 자아 완성을 위한 자기 몰입으로 외로운 길을 걸었던 ‘모던’한 화가. 35세로 생애를 마감하기까지 9년이라는 짧은 화업이었지만 경주 근대화단의 최초 선각자요, 한국 근대미술에 있어서도 위상이 높은 경주출신 서양화가 1호. 그는 바로 토수(土水) 황술조(黃述祚, 1904~1939) 선생이다. 홀쭉한 체구에 장발과 콧수염은 매우 엘리트적인 풍모와 진한 에스프리를 풍긴다. 경주출신 1세대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 경주솔거미술관 ‘경주미술의 뿌리와 맥 7인전’에서의 7인중에서도 가장 선구자인 것. 다양한 소재에 걸쳐 원숙한 기량을 보이는 아카데믹한 자연주의 풍의 유화가 중심을 이루었으나 구성이 자유롭고 실험적인 표현으로 대담함이 엿보이는 작품을 남겼다. 이번 기획은 ‘경주미술의 뿌리와 맥 7인전’에서 토수선생을 시작으로, 7인의 작가들을 차례로 조명할 예정이다. 이번호에서는 경주근대 화단 여행의 첫 출발점인 토수 황술조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토수 선생에 대한 자료를 결집한 최용대 서양화가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며 선생의 자료를 바탕으로 기사가 구성됐음을 밝힌다. 최용대 선생은 토수 선생의 자료와 작품의 유존이 너무 부족해 후배들로서는 가장 안타까운 일이라고 전했다. 이 기획으로, 그들의 예술과 업적들이 다시 조명 받아 경주미술문화발전 전환점의 작은 촉진제가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경주 최초 일본유학 출신 화가, 뒤늦게 한국 근대 미술사에 조명되기 시작 2009년 본지에 게재된 ‘이재건의 미술칼럼-경주의 미술가’ 중 토수 선생에 관한 글에서는 ‘토수 황술조는 경주예술사에서조차 잊혀져가는 경주 최초의 일본유학 출신의 화가이며 한국 근대미술의 태동기에 짧은 생애를 마치고 간 한국화단의 대표적인 서양화가이기도 하다’면서 ‘그가 떠난 1939년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로 어느 누구도 미술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는 시대였으며 특히 작은 시골마을의 문화란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었으리라. 1970년대 말 경제적인 부흥이 도래되고 세상은 미술과 문화 쪽에 눈을 돌리게 돼서야 황술조라는 화가를 발굴하기 시작했고 서울의 재벌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공개되면서 뒤늦게 한국 근대 미술사에 조명되기 시작했다’ 고 쓰고 있다. 토수 선생은 1930년대에 등단한 서양화가다. 토수 선생은 1904년 경주의 대지주였던 황부자집 차남으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계림보통학교와 양정고보를 졸업한 뒤 1930년에 일본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해 개성상업학교와 호수돈여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지냈다. 짧은 교편생활 뒤 1936년에 고향인 경주로 내려온 그는 경주고적보존회 상임고문을 맡는 등 우리나라의 고미술에 심취했으며 취미생활도 다양해 다도와 조원술(造園術)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미식가에다 지독한 애주가이기도 했다. 나중 사망 원인이 후두 결핵으로 알려져 있는데 주위에서는 술병으로 죽었다고 할 정도로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두주불사는 물론,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온몸을 술에 담궜다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도자기 및 고미술에 심취한 선생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를 구하러 제주도까지 다녀왔다는 이야기, 마루 밑에 다수의 청자가 발견됐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수련그림은 연못을 파서 수련을 심어 그것을 그렸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김용준의 근원 수필에서는 선생의 기벽에 관한 글이 전한다. ‘반짝거리는 어떤 물체를 보면 무엇이든 혀를 내밀어 핥는 버릇이 있다. 예를 들어 반짝거리는 구두 끝이나 빛나는 사물이면 무조건 핥아댄다는데 이런 행동이 주벽인지 아닌지는 알지 못한다’고. 1930년 동경미술대학을 졸업이후 1939년 타계할때까지 화가로서 9년이란 짧은 여정동안 얼마만큼의 작품이 제작됐는지 지금은 몇 작품이나 현존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풍부한 표현적 수법과 토속적 소재의 독특한 해석...세속적 명리나 출세에 관심 두지 않아 한편, 1930년대 정착의 단계로 접어든 서양화는 관념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점차 다양한 표현 방식을 받아들인다. 이에 토수 선생은 풍부한 표현적 수법과 토속적 소재의 독특한 해석 등을 잘 드러냈다. 이처럼 경제적 어려움없이 풍류와 여가로 예술의 격조를 더해 갔지만 자신의 세속적인 명리나 출세 같은 데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동경미술대학을 졸업하고도 중앙 화단의 여타 미술운동이나 조선미술전람회 등 보수적 미술전에는 참여하지 않고 외면했다. 재야에서 자유로운 자신의 세계의 완숙을 추구한 것. 선생의 작품은 짚은 향토적 소재에의 편향이 짙어지고 일상에서 소재를 찾는 담담한 시각적 설정과 꾸밈없는 구성의 자유로움이 강한 향토성을 대변한다. 경주에 정착하면서 창작과 풍류에 탐닉하는 여유를 보인 황 화백은 생존시에는 개인전 한번 열지 않았다. 1940년 사후 화우 황우, 이병규, 길진섭, 이해선 등의 주선으로 화신백화점 화신화랑에서 한 유작전에는 40점이 출품됐다고 한다. -지난해 토수 선생의 미공개 수채화 1점 공개 돼 지난해, 토수 선생의 미공개 수채화 1점이 공개됐다. 한 개인소장가로부터 최초 공개된 수채화 ‘연못(수련)’은 종이에 수채, 가로 75cm, 세로 55cm로, 오른쪽 아래에 ‘S. Z. Whang/ 7.1934’라는 영문서명과 함께 제작 연대가 표기되어 있어 획기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져 지역화단의 초미의 관심을 끌었다. 첫 선을 보인 황 화백의 수채화 작품 ‘연못(수련)’에 대해 최용대 선생은 “황 화백의 작품은 유존량도 적은 데다 수채화는 더욱 희소성이 있는 작품이며 보존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호암미술관 소장 ‘연못’과 같은 소재인 연못의 수련을 그린 작품으로 호암소장품과 견주면 붓질의 부드러움과 색채의 풍부함이 돋보이는 수채화의 투명성에 약간의 불투명한 표현이 더해져 유화를 보는듯한 깊이 있는 수작”이라고 했다. 또 “활달하고 거침없는 표현으로 작가의 자유로운 영혼이 느껴지는 작품”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근대 어느 화가보다도 뒤지지 않은 실력의 당당한 화가 근대미술연구가 이경성은 “1973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한 ‘한국근대미술 60년전’ 때만 해도 황술조의 작품은 한 점도 없었다. 이후 1974년 경주 그의 가형집 창고에서 약 70여 점에 달하는 유작이 발견됐지만 그 중 절반 정도는 손상이 심했고 상태가 양호한 작품은 서울의 여러 소장가들에게 분산 소장됐다. 호암콜렉션의 작품 ‘연못’으로 미뤄본다면 그의 작품세계는 근대 어느 화가보다도 뒤지지 않은 실력의 당당한 화가”라고 평가했다. 한편, 최용대 선생은 “경주 발견 40여 점 분산소장과 관련해 몇몇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에, 일부 개인 소장 외에 나머지 대부분은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외 유족(딸)이 일부를 소장하고 있으며 그의 형 황찬조 유족이 약간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새로운 자료 및 미공개 작품들 발굴돼 ‘황술조’의 참다운 면모 드러나길” 최용대 선생은 “토수 선생은 우리가 뵙지는 못했지만 손일봉 선생보다 3년 선배로 알고 있다. 한마디로 활달하고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토수 선생의 묘소가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선생의 형님이었던 황찬조씨의 아들 황동근(경주 연극 1세대)를 찾아 만났으나 자료가 거의 없어 너무 안타까웠다. 사실 자료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대를 했다. 말 하나라도 놓칠까봐 귀를 기울였었다” 며 아쉬워했다. 그는 또 “남아있는 자화상 3점이 아주 독특하다. 자화상의 경우도 스케치 한 뒤 모자만 채색을 하고 사인을 넣을 정도로 대담했다. 지금의 현대성에도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로 선각적이었던 것이다. 영감이 떠오르면 일필휘지하는 빠른 붓놀림으로 단숨에 느낌을 잡아내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 같다. 서명도 영문으로 하는가하면, 한문으로 했다가 굉장히 자유로운 분이셨다. 손일봉 선생만큼만 사셔서도 경주화단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고 했다. “후배된 도리로 경주시립미술관이 생기면 선생의 작품을 보면서 연구하는 것이 희망이다. 유존 작품에 대해서는 앞으로 새로운 자료 및 미공개 작품들이 발굴돼 ‘황술조’의 참다운 면모가 드러나길 바라며 한국미술사에서의 위상은 물론 경주 근대 미술의 출발점의 작가가 토수 선생이기에 그 의미는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