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연에서는 수많은 종류의 동물들이 더불어 살아간다. 약육강식에 따라 약한 초식동물들은 육식동물의 먹이감이 되지만 그 속에서도 초식동물들은 스스로의 생존방법을 찾는다. 사슴이나 들소같은 동물들은 천적에게 끝없이 육체를 내어주며 살아간다. 그 모습은 마치 천적들의 생존에 자신을 희생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초식동물을 잡아먹어야 살아가는 육식동물들이 있기에 초식동물들에게도 여러 가지 긍정적인 요소가 생기기 때문이다. 사슴을 보호하기 위해 사슴의 천적인 늑대만 사냥하고 사슴 사냥을 금지시켰더니 개체수가 늘어난 사슴이 풀을 너무 많이 뜯어먹어 초원이 황무지로 변해 결국에는 늑대는 물론 사슴 그리고 풀들마저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는 미국 카이바브 고원의 교훈은 너무 당연하지만 그 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다. 초식동물들은 보통 무리를 지어 생활한다. 그래야 육식동물에 맞서 새끼를 키우는 등의 생존권 달성이 더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천적은 적은 숫자로 사냥에 나선다. 사실 천적보다 훨씬 더 무겁고 큰 초식동물들도 많아서, 천적이라고 해서 사냥을 쉽고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얼룩말 뒷다리에 얼굴을 차이는 사자는 그 충격에 두개골 골절상을 입을 수도 있고 이는 생존까지도 위협받을 수 있다. 그러니 육식동물들은 무리짓는 초식동물에게는 쉽게 덤비지 않고, 간혹 이탈한 이들을 표적으로 삼는다. 자연히 홀로 동떨어진 초식동물은 아무리 덩치가 커도 육식동물들에게 자주 공격을 받게 되고 결국은 잡아먹히게 된다. 그러면 어떤 초식동물들이 무리를 이탈하게 될까? 먹이를 찾아 끊임없이 이동해야하는 동물들의 특징상 움직일 수 없는 동물들은 따로 떨어지게 된다. 너무 늙거나, 병들어 빨리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다리를 다쳐 자신을 보호할 수 없게 되면 스스로 무리에서 이탈해 최후를 맞는 초식동물들도 있다. 그리고 가끔 반사회성을 지닌 동물이 무리에서 벗어나거나 따돌려 천적의 먹이감이 되기도 한다. 초식 동물이 병에 걸려 무리에서 이탈하여 천적에게 먹이감이 되어 빨리 죽으면 자신의 병이 새끼들에게 유전될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든다. 이와는 반대로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아가는 초식동물은 그 튼튼한 유전자를 후손들에게 전해줄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무리에 도움은 커녕 해악만 끼치는 반사회성 성격을 지닌 초식동물 또한 이를 노리는 천적에 의해 빨리 제거될 가능성이 크니 천적에 의해 집단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초식동물이 사라짐으로써 무리 전체가 더 건강하게 될 수 있다. 초식동물들을 노리며 항상 그네들만 따라다니며 빈틈을 노리는 육식동물이 있기에 초식동물 사회가 더 건강해지고 튼튼해진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약 천적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역시 미국 카이바브 고원의 교훈이 떠오른다. 우리 사회는 어떨까? 만물의 영장이자, 지구를 지배하며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있는 인간이라는 종이 바로 우리니 우리는 전혀 아무 문제없이 잘 살아가고 있는 걸까? 의학이 발달하면서 평균 수명이 늘어났다. 19세기에는 30살에 불과했던 평균수명이 이제는 80세에 육박하며 3배 가까이 더 오래 살게 되었다. 이를 거꾸로 말하면, 각종 지병에 걸려도 이제는 오랫동안 살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며, 동시에 자신이 가진 그 지병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개연성도 그만큼 더 커져버렸다. 나날이 늘어만 가는 반사회성 싸이코패스들의 심각한 묻지마 범죄 역시 선량한 시민들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가끔은 이런 고민도 해본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 과연 과거에 비해 더 나아지고 있는 것일까? 후손들이 살아가야 하는 미래의 모습은 현재보다는 더 좋아지는 것인지 행여나 그 반대는 아닌지 말이다. 김민섭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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