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의 물고기’라는 연극에서 ‘서부시대’의 많은 씬에서는 총성이 자주 울린다. 연극 속의 연극, 프레임 속 프레임에서 쉴새없이 총을 쏘아댈때마다 추악한 세상속 우리들 비겁한 가슴들이 무너지곤 한다.
물기라곤 없는 거친 황야에서 물고기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일까. 2015년 경주시립극단 106회 정기공연 ‘황야의 물고기’가 오는 20일~25까지 경주예술의전당 소공연장에서 그 해답을 제시한다.
이번 정기 공연은 의미심장한 중의적 댓구를 이루는 ‘황야의 물고기’라는 제목에서부터 우리를 낚아챈다. 경주예술의전당 연습실에서 엄기백 감독의 지휘하에 연습에 몰두하고 있는 경주시립극단을 찾았다.
‘황야의 물고기’ 는 강원도립극단 선욱현 예술감독의 시나리오에 엄기백 감독이 연출하고 조연출은 최원봉이 맡았다.
요셉 역에 이협수, 폴리 역에 송정현, 잭 역에 권오성, 다니엘 역에 전봉호, 해리 역에 이명수, 나타샤 역에 이지혜, 빅터 역에 조영석, 존 역에 이현민, 점숙 역에 서은경 등이 열연한다.
이 작품은 일반적인 공연에서 흔히 다루는 남녀간의 사랑이 주요 소재가 아니다. 흔히 볼 수 있는 주제가 아닌 색다른 소재의 연극이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소위 평범한 사람들보다도 ‘못난’사람들이다. 일상에서 어떤 식으로든 문제가 있는 그들은 그것을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그들만의 테마카페모임인 ‘서부시대’라는 장치에 살면서 현실을 도피하고 있다.
이들은 팍팍한 현실에서는 자신의 감정과 말을 표현하기 힘든 소시민에 불과하지만 이곳 ‘서부시대’ 에만 오면 전혀 다른 인물들이 된다.
카페 서부시대 운영자인 이병석은 보안관 존으로, 서부시대 빌딩 건물주 점숙, 망령난 60대 양복점 김씨는 요셉으로, 헤어 디자이너 미세스 강은 착한 술집 주인 폴리로, 핸드폰 전당포 최씨는 비열한 사기꾼으로, 존 역할의 아내인 은숙 등으로 각각 분한다.
평소 분출하지 못했던 큰소리도 치고 허세도 부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황야의 서부시대는 단순한 연극이 아니라 틀 안에서 자신을 속박해야만 했던 사람들이 숨 쉴 수 있는 탈출구인 셈이다.
하지만 이런 서부시대에 두 사람이 개입하면서 이들은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혼란을 겪게 된다. 바로 건물주인 ‘점숙’과 존(이병석)의 아내 ‘은숙’ 때문이다.
건물의 월세와 관리비를 내지 못하면서 시답지 않은 서부놀이나 하는 이들이 점숙의 눈에는 한심스럽게 보이고 은숙의 눈에는 2년간 말없이 집을 나간 남편 이병석을 찾아 와 금방이라도 서부시대의 모든 것을 부셔버릴 것 같다.
그녀들은 극의 중간중간에 불쑥 끼어들면서 그들이 만든 서부시대의 몰입을 방해한다. 그들이 만든 연극은 결국 모두의 바램과 달리 악당이 심판관이 되고, 심판관이었던 영웅이 악당이 되는 모순적인 상황에 모두들 당황한다. 더 이상 마을의 영웅이 될 수 없는 존, 환상이 깨져버린 병석에게는 더 이상 ‘서부시대’도 ‘존’도 필요없다. 병석은 사람들에게 여기서 아무리 이런 연극을 한들 현실의 삶에서는 달라질 게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적인 존보다는 비현실적이더라도 영웅적인 존을 여전히 원하고 있다. 숨 막히는 현실에서 도망쳐 찾은 이곳에서만큼은 현실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서부시대는 여전히 그들의 탈출구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적인 결말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드라마틱한 구조로 극적인 엔딩을 하며한편의 드라마를 완성시키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측면에 이 작품의 결말은 꽤나 사실적이라는 것.
엄기백 예술감독은 “이번 작품은 서울에서 초연한 이후 두 번째로 경주에서 올리는 작품이다. 이 연극의 ‘서부시대’에 모인 이들은 소외받는 계층으로 생업에 종사하면서 저녁이면 이곳에 모여 연극에 몰입한다.
전체 극의 흐름은 서부시대를 배경으로 연극을 하며 각자가 다른 인물이 돼 희열을 느끼며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자연스레 녹이고 있다. 더 이상 영웅일 수 없는 ‘존’ 이라는 인물에 대한 해석과 표현이 훌륭하다”고 설명했다.
관객들 누구나 한 켠에 억눌려 잠재돼있는 자아들이 서부시대 속 등장인물들을 통해 표출된다. 현대인들이 느끼는 답답함을 대신 하소연해주고 대변해 주는 과정을 통해 결국 건강하게 와 닿는 메시지가 통렬한 작품이다.
엄 감독은 또 “이협수 씨가 열연한 요셉 역은 매우 연극적인 특징적 장치다. ‘버스 정류장에 물고기 한 마리 서 있었다’며 예순을 넘은 양복쟁이 아저씨가 읊조리는 이 씬은 이번 작품을 얼핏 서부극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극적 설정으로서 드러내기 싫은 자신의 모습을 현실적인 배우의 뒷모습을 통해 회화적으로(그림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장치는 관객의 시선을 끌며 형이상학적인 대사에 몰입하게 할 것이다”고 했다.
배우들이 몰입해 펼치는 열연만큼 아름다운 컷은 없다는 측면에서 이번 연극은 한층 더 훌륭하다. 한 권의 좋은 책을 읽은 듯한 아카데믹한 연극이다.
여기에 탄탄한 시나리오가 더해지고 엄 감독의 짜임새있고 섬세한 연출이 더해져 연극은 빛을 발한다.
서부시대라는 장치를 통해 모인 비사교적인 사람들이 황야의 어느 한 카페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그들만의 세상에서는 용기를 얻고 에너지가 솟는 그런 공간으로서 서부시대는 지금도 어느 도시 하늘 아래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을 것 같다.
우리들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이번 경주시립극단의 정기공연은 한 해를 정리하면서 그들의 아픔과 상실감에 공감하며 관객들 스스로를 반추하는 성찰의 시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