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원원사지를 찾아가는 길 내내 가을비가 여름 폭우처럼 쏟아졌다. 원원사지가 위치한 봉서산은 정상의 바위들이 위용을 자랑하는 당당하고 늠름한 산세였다. 깊은 골짜기를 따라 산 그림자가 그윽해질 즈음 원원사 경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원원사 경내를 지나 오른쪽 오솔길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보니 이내 옛 절터가 시야에 가득찼다. 비에 젖은 소나무며 석재들은 더욱 추색을 짙게 하고 있었다. 마치 왕릉에서나 봄직한 수령 백 년 이상 돼 보이는 잘생긴 소나무들이 늠름했는데, 이지러진 동서탑 두 기 주위로 도열해 호위하고 있는듯 했다. 동서탑의 다소 훼손된 탑신과 옥개석은 더욱 폐허미를 느끼게 했고 오히려 고색을 더했다. 옛 절터 바로 아래 내려다보이는 현재의 원원사 절간에도 가을이 물들고 있었다. 멀리 울산 시내가 보여 이곳이 조망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두 탑에 새겨진 사천왕상과 십이지신상은 부조의 형태로 새겼지만 환조로 보일만큼 도드라진 수법이었다. 다시 한 번 신라 장인의 예술혼과 신앙심에 감동하는 순간이었다. 폐사지 중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절 터 곳곳에는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석재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두 탑 사이 석등은 중앙 부분이 유실되고 없는 상태였다. 동서의 탑만해도 그 당시 사찰의 규모가 짐작이 됐다. 원원사지는 이틀에 한 번은 문화재과에서 직원이 나와 점검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와 함께 현재의 원원사가 있어 폐사지도 잘 유지 보존되고 있는 편이었다. -김유신·김의원·김술종 등 국사를 논의하던 중요한 인물들 함께 세운 호국사찰 원원사터는 외동읍 모화리 봉서산 기슭에 있다. 모화리 마을 입구에서 한참을 올라가면 원원사터를 만날 수 있다. 원원사는 석축을 이용한 가람으로, 비탈진 지형 위 높은 언덕에 안정감있게 위치하고 있었다. 현재 절 이름은 원원사(遠願寺)지만 삼국유사에는 ‘遠源寺’로 전하며 동경잡기에는 ‘遠願寺’로 전해진다. 현재의 원원사는 대한불교천태종에 속하는 사찰로 옛 절터 아래 36년전에 새로 지은 소규모 사찰이다. 옛 원원사는 신라 신인종(神印宗)의 개조인 명랑법사가 세웠다고 하며 통일신라시대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의 중심도량이 되었던 사찰이다. 명랑의 후계자인 안혜·낭융 등과 김유신·김의원·김술종 등 국사를 논의하던 중요한 인물들이 함께 뜻을 모아 세운 호국사찰이다. 창건 이후의 역사 및 폐사시기 등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현재는 부도(浮屠) 4기와 동·서 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석탑의 동북쪽의 부도 3기, 서북쪽에 최근 발견된 1기의 부도가 있다. 이들은 모두 고려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옛 절터는 사적 제46호로 지정돼 있다. 원원사 현오 주지 스님은 “김유신 장군은 김의원, 김술종 들과 당군을 물리치는 데 이미 불력을 과시한 바 있는 신인종의 고승 안혜, 낭융 들과 더불어 원원사를 창건했다. 절의 위치가 동해로부터 들어오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관문산성이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세워져 평소에는 스님들이 수행을 하고 전시에는 서탑앞에서 관문성이 보여 적의 움직임을 보고 군사 지원을 했다고 한다. 또 당군을 격퇴시키는 데 큰 불력을 나타낸 신인종의 승려들과 힘을 모아 절을 세웠다는 점은 원원사가 갖는 호국불교적 성격을 말해주는 셈”이라고 했다. -원원사지 동·서 삼층석탑 원원사지를 지키고 있는 이 3층 쌍탑은 부분적으로 파손된 부분이 유난히 많은 편이다. 이 탑들은 1900년 초에 금당 앞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30년 교토제국대학의 건축학과 조수였던 노세우시조오(能勢丑三)가 조선총독부에 건의해 복원하게 되었다. 당시 서봉총 발굴 참여로 널리 알려졌던 고 석당 최남주 선생이 참여한, 경주고적복원회의 주도하에 1931년 가을, 탑을 복원했다. 상륜부는 노반과 앙화까지만 남아있다. 2중 기단위에 3층으로 건립된 이 탑의 전반적인 구성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의 모습을 보여주며 기단과 탑신에 있는 뛰어난 조각으로 유명하다. 상층 기단 면석에는 4면에 3체씩 연화좌위에 평복을 입은 십이지신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1층 몸돌 4면에는 사천왕상이 각 1구씩 아주 높은 돋을새김으로 조각돼 있다. 1층 몸돌에 사천왕상이 등장하는 가장 최초의 석탑이 바로 이 원원사 석탑이다. 이들 조각들의 섬세하고 유려함은 다른 석탑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이 쌍탑은 8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9세기에 유행하는 같은 형식의 석탑 중 가장 빠른 예다. 서탑은 동탑보다 파손이 더 심했다. 서탑의 사천왕상은 손상이 심해 온전한 것이 없다. 보물1429호로 지정된 것은 십이지신상이 온전히 탑신에 새겨져 있으면서 무사의 형상으로 릉을 수호하는 궤릉 등의 경우와는 달리 이 탑의 십이지신상들은 연화대 위에 있으며 뒤에는 비천의 무늬가 흐르고 있다.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십이지신상 가치를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두 석탑은 모두 지붕돌과 몸돌이 하나의 통돌로 만들어져 있다. 현재 그 연유를 알 순 없지만 탑의 지붕돌 일부가 떨어져 바닥에 있었다. 비교적 또렷이 남아 있는 조각들은 신라 예술의 또 하나의 자랑이 될 만하다. 원원사 석탑은 아래층 기단에 십이지상을 최초로 배치한 점과, 석탑의 조각 수법, 구조적 특징, 표현 양식 등을 고려할 때, 학술적인 면은 물론이고 미술사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 석탑이다. -원원사지 내년 정비될 예정... 폐허미 잘 간직할 수 있는 정비 원해 현오 주지 스님은 “봉서산이란 이름은 이곳 산세의 모양새가 봉황과 닮았다고 해 지어진 듯하다. 이곳에는 예전 신라부터 용왕각이 동서에 두 곳 있다. 전체적으로 원원사지는 용두의 형상이다. 금당을 앉힌 자리가 그렇다. 지금의 원원사 대웅전은 건립된 지 36년 정도다. 옛 법당은 40여 년 전 불탔다. 외동, 연안, 말방 쪽의 신도들이 이 절을 많이 찾는 편이다”고 했다. “절터의 두 탑 사이에 있는 민묘(民墓)는 조선시대 청안 이씨의 묘로 알고 있다. 원원사지는 청안이씨 문중산의 일부다. 이 절터를 포함해 이 산 일대가 그들의 소유였다고 한다. 최근 민묘를 경주시에서 매입한 상태”라며 “문화재청 팀이 다녀갔고 내년 정비될 예정으로 알고 있다. 뒤편 용왕각 옆에도 집터로 추정되는 제법 큰 주춧돌이 있으나 지금은 토사가 밀려와 거의 묻혀져 있다. 세월의 이끼가 두껍게 낀 부도(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묘탑)도 있으나 지금은 길이 나있지 않아 갈수가 없다”고 했다. “정비가 되면 그간 묻혀있던 여러 석재나 석축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자연을 해치지 않고 조화로운 미가 흐르는, 폐허미를 잘 간직할 수 있는 정비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한편, 원원사는 지금까지의 자료를 취합해 책으로 발간할 예정이다. 현오 주지 스님이 한 장의 흑백 사진을 기자에게 보냈는데 오세윤 작가가 제공했다고 하는 복원 당시의 귀한 자료였다. 탑 복원 당시 일본 역사학자와 일본 기자가 같이 왔는데 당시 상황을 찍었다고 한다. 오세윤 작가는 그 기자의 집을 찾아가 사진 한 장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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