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층 목탑 복원으로 유명한 ‘황룡사’와는 다른 ‘황용사’가 있다. 경주 시내를 벗어나 감포 가는 국도변에 있는 황용동 입구에서 2km 남짓 산길을 따라 들어간 곳에 황용골 황용사지가 있다. 경주의 산세 중 험준한 편인 산골에 위치하고 있는 황용동은 해발 400여 미터로 마을이 형성돼 있다. 이곳에는 황용사라는 절과 황용사지라는 폐사지가 있다. 지난 19일 찾은 불국사 말사 황용사지는 쓸쓸해 보였다. 아무런 안내판이나 표식이 없다. 폐사지에 배여있는 폐허미는 유장했지만 아무렇게나 베여진 대나무들이 여기저기 쓰려져 절터의 품격을 어지럽게 하고 있었다. 아무런 표지판도 경구도 없었다. 속절없는 시간의 더께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절에서 마련한 것으로 보이는 불전함은 무너져 쌓여있는 두 탑의 고색함과는 거리가 먼 생경함으로 다가왔다. 이끼로 뒤덮인 탑재들 사이로 핀 들국화는 오히려 애잔했다. 처연하게 말없이 쌓여진 탑재들과 절터의 흔적은 또한 아름다웠다. 발굴과 복원이 시급해 보이지만 복원 이후 사라질 유미적인 장면은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는 아이러니를 생각하니 슬며시 웃음이 났다. 하지만 최소한의 정비, 이를테면 대나무 정리와 주변 정화 정도는 시급해 보였다.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폐사지가 가진 역사성에 대한 예의일테니..., 황용사 뒤편 널찍한 언덕에 위치한 옛 절터는 동서탑 형태의 탑재들과 함께 절의 축대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황용사지 아래로는 황용골에 모여사는 농가들과 가을색 완연한 산들이 내려다 보였다. 황용사지 옆 쪽에 또 다른 탑재들이 어지럽게 쌓여져 있었는데 이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승의 사리탑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절골’이라는 표현의 연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자연 거스리지 않는 특이한 형태의 가람 배치로 웅장한 규모 자랑하는 큰 절이었을 듯 경주에는 같은 이름의 황용사가 2군데 있는데 잘 알려진 구황동의 황룡사(皇龍寺)지는 ‘皇(임금황)’자를 쓰고 옛 은점산(지금의 동대봉산)자락의 황용사(黃龍寺)는 ‘黃(누를황)’자를 쓴다. 황용사 경내 안내문에는 “본 도량은 신라시대 A.D 633년경에 처음 세워져서 황용사 또는 황둔사(黃芚寺)라고 전해져 왔다. 조선시대 인조때 불국사의 담화스님이 임진왜란때 소실된 절을 중창했으나 그 이후 다시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폐탑과 초석으로 그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골짜기에는 99암자가 있었는데 물이 좋고 산세가 뛰어나서 많은 고승을 배출했다고 한다. 절이 많은곳이라 ‘황용동 절골’로 근래까지 불려져 왔다. 지금 도량내 폐탑 유적과 금당터 등은 자연을 거스리지 않는 특이한 형태의 가람 배치로 황용사는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큰 절 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씌여 있다. -역대 왕들이 힐링을 하던 도량으로 추정...탑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3층석탑과 절터의 흔적으로 추정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황용사가 있는 은점산은 아무리 가뭄이 와도 가뭄을 타지 않고 습기가 많은 곳으로 일찍이 황용사를 창건하고 약사여래상을 모셔 병든 사람들의 심신을 치유한 신령스러운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황용사에 온지 5년째인 주지 도연 스님은 “황용사는 선덕왕(선덕여왕) 2년(633) 무렵 창건됐다고 한다. 누를 황자는 오방의 중앙이라는 의미다. 그만큼 이곳이 당시에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 곳이라 보면 된다. 여기는 절골 마을로 원효 스님이 절골 마을 안에 20개 암자를 거느리고 살았다고 한다. 분황사. 백율사와 함께 3대 약사여래불이 있는 절이다”고 했다. 황용사는 특히 아기자기한 계곡이 아름다운 절터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천연 폭포가 여럿 있었다. “물이 마르지 않았던 곳으로 역대 왕들이 힐링을 하던 곳이었다. 조선 중기 신문왕때 토함산 산행을 하다가 이 골짜기를 보고 용이 누르고 앉아있는 모습의 형상이라고 해 지명이 황둔사에서 황용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곳은 동해로 기도하던 길에 있는 행차로였다. 황용사는 왕실에서 관리를 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황용사 입구는 사냥하던 길목이었고 이 절골까지 오면 하루를 묵으면서 쉬고 기도를 하던 곳이었다. 당시 큰 절이었던 기림사와 동해의 감은사지에서 기도를 드리고 다시 토함산을 넘어와 석굴암, 불국사를 거쳐 다시 경주 시내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로 보아 여기는 역대 왕들이 힐링을 하던 도량이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학자들은 황용사지는 신라의 왕들이 들르던 곳이었으므로 아주 우수한 등급의 탑의 형태로 분류했다”고 했다. 과연 남아있는 석탑재들을 보니 옥개석이나 면석들이 컸다. 당시 두 탑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두 탑은 경주원원사지와 양식이 비슷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3층 석탑으로 유추하고 있으며 심플하면서도 단단하다. 단순한 문양과 함께 매우 견고하게 만들어졌으며 이곳의 돌로 만들었다고 한다. 탑재들은 사람의 살색처럼 부드럽고 온화한 느낌이었다. 도연 주지 스님은 “옛 왕들이 오히려 이 절골을 더 아낀 것 같다. 탑의 양식으로 보면 분명 통일신라시대의 석탑과 절터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음에도 현재는 경주의 수많은 문화재에 밀려 오히려 묻혀 버린 곳이다. 이 절에 대한 문헌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 저도 계속해서 학술적 근거를 모으고 있는 중”이라고 전했다. -“다른 지자체라면 벌써 발굴 됐을 것, 다소 시간이 걸릴뿐이지 발굴되고 복원될 것” 도연 스님은 “‘불국사 고금단기’에 의하면 이 절에 대한 문헌들에 대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지난해 이곳을 다녀간 문화재청 팀은 황용사에 대한 문헌이 많이 부족해 계속 검토 중이라고 했다. 이곳은 연화길지라 일컬어졌으며 이는 연꽃 속의 절이라는 의미다”고 했다. “아직까지는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이만한 도량이 없다. 경주를 다 다녀봐도 훌륭한 환경만으로도 수행하고 공부하기 좋은 곳으로 으뜸이다. 옛 왕들이 이 골짜기를 그렇게 찾을 정도면 그만큼 치유가 됐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사찰 탐방객이나 학계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다른 지자체라면 벌써 발굴이 됐을 것이다. 다소 시간이 걸릴뿐이지 발굴되고 복원될 것으로 믿는다” 한편, 고려탑지와 황용사 폐사지 소유는 황용사다. 황용사지 서탑 일부가 개인소유라고 한다. -폐사지 허허로움 통해, 우리 일상 비우고 충분히 치유돼 돌아올 것 그날, 황용절골은 신자 두 명이 기도를 하러 오갈 뿐이었다. 봄이면 성인의 키보다 큰 연달래가 이 절골 여기저기 지천으로 피고 정갈하게 흐르는 계곡물은 피라미들의 실핏줄까지 보일 정도로 맑았다. 가을 맑은 햇살은 황용절골 구석구석까지 비춰 이곳을 찾는 이들의 심신을 영글게 한다. 준비해 간 김밥과 커피로 너른 계곡의 바위위에 걸터앉아 먹는 작고 소박한 사치를 독자들도 누리길 권해 본다. 황용사지 가는 길은 출발할때부터 벌써 마음이 서늘해 질 것이다. 흔한 표현을 빌지 않더라도 폐사지의 무상함과 허허로움을 통해 오늘, 우리의 번잡하기 이를데없는 일상을 비우고 충분히 치유돼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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